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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Aug 01. 2021

9. 드디어, 바이칼 호수

[9288km] 이르쿠츠크 → 바이칼 호수, 2018년 8월 3일

새벽부터 분주한 날이었다. 어제 사둔 분말 감자 컵(상표가 '도시락'이었다)을 대충 먹고, 부지런히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트램에 올랐다. 올혼 섬에 가는 날이다.


알아들을 수 없어 불안했던 탑승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바이칼 호수 중간쯤에 있는 올혼 섬 행 페리 선착장까지는 세 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 창 밖으로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벌판이 눈앞에 서서히 펼쳐졌다. 그 풍경은 여러 여행 블로그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해 묘사하던 그대로, 정말 멋들어졌다.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어 나타나는 광활한 들판에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끝없이 넓고, 그 넓음 자체가 아름다웠다.

한동안 기다린 끝에 도착한 페리에 자동차들이 하나 둘 올라타기 시작했다. 타고 온 대형 버스는 페리를 타고 섬까지 건너가지는 않았다. 대신 올혼 섬 현지의 낡디 낡은, 뒷문이 한 번에 끝까지 닫히지도 않던 버스에 올라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고된 길이었음에도, 바이칼 호수의 풍경에 감탄하느라 힘들어할 새도 없었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여행 감수성이 마구 되살아나는 듯했다.

예약한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후지르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관광촌이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해수욕이 아닌 호수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큰길 좌우로 늘어서 있는 기념품 가게, 액티비티 기어 렌털 샵이 마치 유명한 해수욕장을 보는 듯했다.


작은 마을 만한, 그래서 호기심이 동했던 숙소 '니키타 하우스'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았다. 니키타 하우스 안에 있던 카페에서 모히토를 한 잔 마시며 혹시라도 난처한 일이 생길까 싶어 버스 안에서 아무것도 마시지 못해 생겼던 갈증을 조금 달랬다. 그리고 잠깐 쉬자마자, 그새 바이칼 호수가 또 보고 싶어 숙소 바로 뒤편에 있는 호숫가로 나갔다.

바이칼 호수의 풍경은, 부르한 바위 주변의 광활한 그 풍경은 내가 러시아 여행을 결심한 일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지 일깨워줬다. 호수 건너 저 편에 보이는 시베리아 벌판이 마치 다른 세계의 육지처럼 느껴졌다. 단지 호숫가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너무나도 큰 만족감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했었다. 폭풍같이 저녁을 먹어치우고(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절반 정도는 뺏어먹었지만), 해가 진 호숫가에서 별을 보고 싶어 다시 밖으로 나갔지만 아쉽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해 그냥 돌아왔다. 내일은 아무 일정도 잡지 않고,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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