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늘 겪고 나서야 깨닫는 실수를 반복한다.
아무리 새로운 걸 좋아해도 언제나 처음은 어렵고 낯설듯 세부에서의 첫 주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새로운 날씨부터 2번의 레벨테스트, 매일 6시간씩 듣는 수업. 24시간 다른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는 환경까지. 매일이 새로운 과제 같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지금껏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해 왔기에 이번에도 금방 적응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힘들기보다 재밌는 마음이 컸으니까.
그랬기에 어학원에서 보낼 2달은 한국에서 계획했던 대로 잘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믿고 싶을 만큼 간절했던 거였지만.
사실 한국을 떠나올 때,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보통 자리를 잡기 위해 애쓰는 20대 후반에, 익숙하고 편한 환경을 버리고 다시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적어도 나중에 '내가 그때 왜 나왔지?' 하면 후회하지 않아야 했으니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어른으로 늙고 싶지 않아서 이 길을 선택한 만큼 더 진지했으니까. 지금 이대로 살지 않기 위해 좀 더 단단한 결단과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이곳에서의 목표도 뚜렷했다. 매일 일기로 여기서 느낀 걸 기록으로 남기자고. 그리고 세부에선 즐기기보다 영어 실력을 더 우선순위에 두자고. 어차피 물도 무서워하고, 쇼핑도 안 좋아하니까 여기서 영어 실력을 좀 더 쌓자고. 대신 호주 가서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느끼자고.
마음 하나는 확고했기에, 목표한 그대로 생활할 수 있었다. 여행이나 쇼핑 나들이는 거의 거절하고. 6시간 수업에, 배운 걸 복습하고, 사람을 모아 영어 스터디도 만들어 부족한 걸 채우고, 또 필요한 경우에 다른 자료를 활용해 공부하고.
이렇게 계획대로 흘러가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날세운 고슴도치가 기를 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포기하듯 결국 내 몸이 파업을 선언해 버렸다. 약을 먹어도 차도 없이 열이 3일 내내 오르락내리락 거려 정신을 못 차리고. 그렇게 괜찮아졌나 싶더니 다시 식중독으로 포카리 스웨트만 미친 듯이 먹다가 도저히 안 돼서 병원에 다녀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 탓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는 것도 안 맞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는데,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없이 달리기만 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억지로 그렇게 나를 몰아세운 거니까.
그렇게 몇 번이나 잔잔하게, 또 심하게 아픈 뒤에 깨달았다. 계획만 보고 가면 결국은 지치기 마련이라고. 계획 세우는 것도 좋고, 그걸 실천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에게는 '여유'라는 틈이 필요하다고. 오히려 그 틈이 목표로 더 빨리 가는 방법일 수 있다고. 그리고 내 삶에 '즉흥'을 더 끼워 넣을 필요가 있다고.
그제야 나는 나를 좀 놓게 됐다. 중간중간 나들이를 나가기도 하고, 사람들과 모여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외국인 친구랑 바람 쐬러 카페에 가기도 하고, 한식 먹으러도 가고.
그때는 아파서 고생했지만 지금은 그때 아파서 다행이었다 싶다. 그게 아니었다면 해외 생활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니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한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결국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호주 가서 탈이 났을 테니까. 그때 아팠던 덕분에 호주 생활은 건강하게, 더 재밌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