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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Aug 19. 2022

도쿄 지하철에서 커피 내리는 영화

카페 뤼미에르


격리 기간. 긴 의자의 양 쪽 끝에 앉아 조용히 관찰했다. 감상했다기보다 관찰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커피와 지하철과 도쿄라는, 좋은 건 전부 모아놓은 영화.



한국 포스터보다 영화를 백 배쯤 잘 표현했다.



#1 앞모습이 없는 그림


상당히 뒷모습이 많다.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하철이 지나간 다음 바로 이어지는 첫 번째 씬에서 주인공 요코가 전화하며 등장할 때에도  

    무심하리만치 무덤덤한 어조로 임신했음을 엄마에게 알리는 커트에서도  

    제사 비슷한 걸 지낸 다음 세 가족이 다찌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식사를 할 때에도  

그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때로는 옆모습도 존재한다. 하지메의 가게에서 요코는 왼쪽 옆얼굴을 보여주더니 다음번에 같은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엔 오른쪽 옆얼굴을 보여주었다. 카메라의 시선이 180도 회전했기 때문에 정면을 보이던 하지메는 또 뒷모습이 되었고.



#2 고정된 앵글로 바라보는 공간 속 소리의 중첩


감독은 고정된 앵글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본가의 집 안 풍경.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낮이나 밤이나 똑같다.


때때로 공간을 조망하듯 약간의 패닝만 해줄 뿐, 대체적으로 가만한 앵글은 "공간의 인상"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전지적 시점으로 이미지 라인을 녹여내는 대신, 한 명의 관찰자로서 기능하는 카메라다.


바 장면에서 요코의 통화 소리는 다른 사람의 말소리와 겹친다. 잘못 들어간 소리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용과 관련 없는 목소리. 그런 노이즈조차 인위적으로 걸러내지 않고 살려 줌으로써 이것은 연출이 아닌 일상의 관찰임을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깨닫게 한다.


복잡한 도심을 걸을 때에도 오디오는 돋보인다. 아니, 돋보인다기보다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야 알맞을 것이다. 그만큼 시각 효과와 청각 효과의 주객전도가 뚜렷하다. 요코의 모습이 지나가는 행인들 틈에 묻히든 말든, 카메라가 요코를 놓치든 말든, 상관없이 영화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오직 통화 소리에 의지해서. 보여주고픈 걸 따라가지 않고 들려주고픈 걸 따라간달까.



#3 일상 관찰


여행 같은 관찰 때문에 보게 된 영화다. 주인공은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자각이 되풀이되는 영화. 요코가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려야 했다.


굉장히 의미 있을 것 같지만 의미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메의 가게를 찾아온 커피 배달부와  

    긴자 2 번지에 대해 물을 때 옆에 있던 식객과  

    때로는 아버지에게 야채 절임을 갖다 주는 어머니까지  

장히 의미 없을 것 같지만 의미 있는 사람들이었다.



#4 세로선


세로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듯한 감독은 거의 모든 커트를 세로선으로 막아 두었다. 제발 그만 좀 막았으면 좋겠다 싶었을 때도 있었고, 지극히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사람으로 막혔을 때는 좀 나았다. 취재하고 싶었던 사람을 드디어 만난 후, 한껏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요코의 오른쪽이 커다란 버드나무로 막힐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쿄는 그런 것일까? 도쿄는 이렇게 막혀 있다는 것일까?


언제나 이런 그림의 틀은 필요하다.



#5 지하철


지하철로 시작하여 지하철로 끝나는 영화였다. 약속이 깨지면 기차들은 복잡한 선로들을 따라 움직이고, 틸다운 된 카메라의 시선 끝 역시 지하철 플랫폼이었다.


하지메의 그림 속 하지메는 지하철들에 둘러싸인 채 시계를 쥐고 있다. 지하철 소리를 녹음하는 소년은, 막힌 공간에서 열린 소리를 찾았을 것이다.


지하철의 두 열차가 교차하는 순간. 360 도로 회전하는 카메라 속에서 두 인물이 교차되었을 때. 저런 지하철이야말로 도쿄답다는 생각을 했다. 도쿄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어느 조용한 바에 방문했던 몇 년 전. 프로젝터가 벽면에 쏘던 이 영화를 눈으로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제목을 알아내고 돌아온 스스로를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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