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필라테스를 좋아하게 되면서 운동에 대한 강박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섰고 당연한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해서 움직였다. 몇 주 전부터 새로운 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새로워서 스스로 나 자신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어쩔 수 없는 시간들로, 혹은 굉장히 중요한 시간들로 인해 나의 가장 중요한 운동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운동을 즐기고 좋아하게 되면서 채찍질하던 습관을 잠시 놓게 되었다.
클래식 필라테스 강사들이 모여 운동을 하는 날이 찾아왔다. 몇 주간 평소만큼의 강박에 가까운 열심히가 없었기에 결과는 처참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따뜻한 손길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지만 내면에 남은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극심한 위경련이 찾아왔다. 운동을 못하는 것에 대해 과정은 스트레스 받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들은 타인의 노력을 마주했을 때 당연한 시간들이라 느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분노와 고통은 나를 한층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좋아할 수 있지만 강박적인 행위를 버릴 수 없다는 것. 인간은 각자의 목적과 목표는 다르지만 나의 목표는 꽤나 심오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즐기면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으로 생겨날 문제를 외면한다. 그러한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소리를 지른다.
“산다는 게 원래 문제 투성인 거요. 사람이 산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세요? 허리띠 느슨하게 풀고, 남들하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거예요."
트레이너 시절, 운동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운동을 하지 않고 수업만 하고 있어도 트레이너는 신체를 매시간 검증받는다. 몸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언제나 보여야 했기에 영양까지 신경을 써야 했고, 언제나 긴장 가득한 강박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랬던 습관이 나의 일상까지 영향을 미쳤다.
과거라면 내게 생겨난 문제들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 했어.'
'역시 나는 그런 게 맞지 않아.'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르바의 말처럼 강박적인 행위조차 문제투성이의 삶이 아닐까? 강박적으로 운동을 하던 삶을 살다가 잠시 강박을 내려놓고 운동을 즐겼더니,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합의점을 잘 찾아야 한다. 조르바가 말했던 허리띠 느슨하게 풀고, 남들하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것처럼.
'운동 강사에게 강박이라는 것은 필요하다. 강박에 사로잡히면 안 되지만 1%의 강박도 없다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회원님을 레슨 하는 중이었다. 그날은 운동이 정말 잘 되었다. 꾸준히 성장한 회원님의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조금의 긴장감을 받게 되었다.
"회원님 요즘 러닝도 하세요?"
"그럼요 선생님. 시간이 안 되면 주말에라도 꼭 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그런데 그만 좀 열심히 하세요 하하 회원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강사가 직업인 저는 정말 더 열심히 해야 됩니다."
"아이고 선생님 운동과 비교가 되나요 하하"
그분은 열심히 하시는 회원님들 중에서도 최고 열심히 하시는 분이다. 자신의 하루 삶 속에 운동은 중요한 행위가 되어있다. 레슨을 중심으로 운동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동 속에서 레슨이 진행된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런 분들을 레슨 할 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성장되는 분들을 레슨 하려면 성장을 멈춰 서는 안 된다. 단 기간에는 알 수 없어도 긴 시간을 함께 하면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사에게는 '강박'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강박에 잡아먹히지 않는 강박적인 행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슈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포기는 자기가 바라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곧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둘이 섞인 세 가지 열매를 번갈아 맛본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행위나 행위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 자유를 누린다.
운동, 자유, 집착은 공존한다. 운동을 하면서 감격스러운 자유를 느낄 때가 있다. 운동을 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집착을 느낄 때도 있다. 이렇게 세 가지는 얽매이는 감정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크리슈나 말처럼 집착은 인간에게 불필요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집착과 강박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강박은 긍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집착은 부정만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착이 있다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관계라는 일상 속에 집착이 있다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명예라는 숭고함에 집착이 있다면 명예로울 수 있을까?
집착을 버린 강박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운동을 지도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그들의 삶 속에 운동을 중요한 행위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운동을 통해 자유의 일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운동 강사라는 직업은 집착을 버릴 때 타인에게 긍정을 줄 수 있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부정을 줄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런데 크리슈나의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르주나처럼, 집착을 버린 강박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집착과 경쟁이 풍부한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힘들다.
집착을 버리고 올바른 강박을 가진 강사가 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어린 트레이너였던 시절 많은 고객들에게 심리적 실수를 저질렀다. 집착으로 비롯된 나의 강박을 그들에게 강요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이었고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그때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험 없는 인간의 생각은 한 방향으로 정해진 채 굳어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강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해야 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나의 성장을 위해 상처를 받았을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다.
'어쩔 수 없었다고'
'과거일 뿐이라고'
이런 하찮은 변명을 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신념이 타인에게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당신을 만났을 때의 나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요된 신념을 가진 나약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