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어느날 아빠의 형제 A에게서 전화가 왔다. 2시간 뒤 고속터미널로 나와서 화물을 받아가라는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었다. 아는 약사를 통해 소개받은 비타민제가 암에 특효라고 했다. 내가 떨떠름해 하자 그는 장난스레 생색을 냈다.
이거 한 달에 300만원짜리야. 돈 생각하지 말고 하루 여섯 포씩 아빠 꼭 챙겨드려.
암에 걸리면 환자와 그 가족들은 쉽게 의료인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장사치들의 먹잇감이 된다. A가 추천한 약 역시 엄연히 약사가 팔고 연예인이 홍보모델까지 하는 영양제라고 했다.
하지만 형제를 월 300만원씩 들여 살리고야 말겠다는 그의 간절함만큼이나 내 단호함도 굳세기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병원에서 하라는대로 일상을 유지하고 표준치료 잘 따라가는 게 최선의 치료라고 생각해요. 주치의가 하라는 것만 제대로 하기도 버거워요. 이렇게 하시면 치료가 방해가 됩니다."
A는 이미 서울에서 화물을 부치기 위해 터미널로 차를 끌고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막무가내였다. A는 신신당부했다.
이거 약 만든 사람도 엄마가 대장암이었대. 먹고 지금은 다 나았대.
이것은 암 환자와 가족의 혼을 쏙 빼놓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아빠의 병에 대해 공부하면서 절대 영양제 같은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암이 낫는다는 둥의 얘기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같은 병을 앓는 누가 완치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빠를 위해 월 300만원을 턱 하고 내놓을 수 있는 형제의 마음이라도 내가 중간에서 전달책 역할을 하기로 했다.
나는 터미널에서 거대한 박스를 받아들고 집에 왔다. A는 "그 안에 피부의 독소를 빼주는 비누와 샴푸도 있으니 꼭 아빠를 쓰게 하라"고 했다. 아니, 피부의 독소를 빼서 암을 고칠 거면 진즉에 항암제를 크림 제형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실소가 나왔다.
현관에서 부욱 하고 택배 상자를 뜯자 책자들이 먼저 보였다. 영어로 된 논문과 각종 통계를 짜깁기한 자료였다. 약을 개발했다는 약사의 이력엔 자연치유 어쩌구 모임 회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자연치유'니 '명현현상'이니 문구를 보자마자 그대로 상자를 밀봉해버렸다.
친척이 보낸 월 300만원짜리 비타민제. '자연치유'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밀봉해 반품해버렸다.
짜증이 아니라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이 약에 기대 소중한 자산을 낭비하고,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다행히도 아빠는 병원 지침을 잘 지키는 모범 환자였다. 그 나이답지 않게 건강보조식품에 현혹되는 사람이 아니었고 원체 의심도 많다. 어쩌면 나의 단호함도 아빠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암 진단을 받은 후 아빠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지만 비(非)환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암에 좋다는' 보양식을 따로 밥상에 올린 적도 없다. 그저 아빠가 당기는 음식을 차리고,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채소는 원래도 소처럼 많이 먹는다). 하루 30분 정도 걷기 운동을 하고 원래 먹던 유산균과 비타민 B, C, D 정도를 챙겨먹는다. 항암 부작용으로 탈모는 없어서 새치 염색도 주기적으로 한다. 아빠가 건강에 좋다고 믿는 식품은 예전부터 챙겨먹던 낫또 정도이다.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형제가 자신에게 월 300만원씩을 기꺼이 쓸 수 있다는 데 퍽 감동을 받은 듯했다. 단칼에 거절하기 미안했던지 마침 외래날 병원에 문의했다. 전문간호사는 영양제 종류를 보고 가격을 듣더니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 암 환자에게 일반인 용량의 여섯 배를 먹으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특히 출혈 위험 때문에 먹지 말라던 오메가3도 과도하게 포함돼있다며, 300만원은 말도 안 되는 비용이라고 했다. 아빠에겐 명분이 생겼다.
항암치료 기간 중 특정 식품을 과도하게 먹으면 간과 신장에 무리가 가니 각종 민간요법에 흔들리지 말라는 병원 지침은 단순명료하지만 생각보다 지키기 어렵다. 암 환자가 지키려 해도 주위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홍삼즙부터 시작해 뭐가 좋니 마니 하는 개입 혹은 관심이 시작된다.
결국 악역은 내가 맡았다. A에게 "아빠가 정말 마음이 너무 고맙다고 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절대 먹지 말래요"하고 300만원짜리 그것을 반품시켰다. 좀 피곤했다.
대개 '좋대'로 끝나는 권유들이 무례하게 느껴진다. 생각해주는 마음만 고맙다. 암종을 공부하고 환자, 보호자와 치료법을 상의할 생각도 없이 대뜸 들이미는 시도들에 환장할 노릇이다. 권유하는 사람의 마음을 고려해 유하게, 그러나 단호하게(이것이 가능한가?) 암에 좋다는 모든 것들을 막아내는 일도 보호자의 업무 중 하나이다.
아니나다를까 A가 권한 비타민제는 환우회 카페에서도 활발히 언급되고 있었다. '약을 먹고 기력이 돌았다'는 평도 있는 반면 '약 먹고 간 독성으로 회복 불가한 상태에 빠졌다'는 고발도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관련해 삭제된 댓글들도 많이 보였다.
A의 300만원짜리 비타민제 사건은 한동안 우리 가족의 농담 소재가 됐다. 그 사건 이후로 치료의 대원칙은 더 강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원칙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정말 악한 자는 누구인가?
아무리 검증된 치료법을 따른다고 결심해도 더 이상 현대의학으로선 치료법이 없는 사람들에겐 월 300만원짜리 똥도 동아줄이나 다름 없다. 그런 풍문들로 한때 개똥쑥이 암 환자들 사이에서 필수 식량이 되었고, 인간이 개 구충제를 먹는 촌극도 벌어졌다. 임종 직전까지 허황된 치료법에 희망을 걸고 자산을 탕진하고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암 환자 고객'을 상대하는 장사치들이 어떤 책임을 질 의지나 갖고 약을 파는 것인지 분통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