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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Mar 13. 2022

암 환자 보호자가 가장 듣기 싫은 말

미안해, 고마워, 고생한다

아빠가 암 진단을 받은 뒤 들은 말이 많다. 아니, 내가 부모님과 함께 머물며 아빠를 돌보고 병원에 데려가는 역할을 맡게 되자 들은 말이 많다. 대부분의 말에는 선의가 깔려있지만 나는 귀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생들의 "미안해", "고마워"가 그렇게도 듣기 싫었다.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이상이 있었다. 나는 위로의 말보다 돌봄 부담을 어떻게 나눌지 구체적 계획이 더 필요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은 돌봄 부담이 나에게 쏠려있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맙다는 말도 듣기 싫다고 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라는 동생에게 철커덕 마음의 문이 닫혔다.


아빠의 상태를 묻는 친가 식구들의 연락이 잦아졌다. 초기엔 외래 진료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아빠의 형제들에게 전화를 돌려야 했다. 우애 강한 그들에게 전화 한 통 걸기 어렵진 않다. 아빠의 상태가 양호하고 나 역시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말이다.


하지만 방금 진료실에서 "생존율이 50%이고 항암 치료로 조금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말을 듣은 착잡한 상황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귀찮음과 짜증, 괴로움에 가까웠다. 말 꺼내기조차 참담한 이때 나는 '생존율 50%'는 뭉개고 "항암하면 괜찮대요" 정도로 눙칠 수밖에 없었다. 대개 많은 이들이 환자를 배려해 직접 전화하진 않지만 보호자에겐 쉽사리 환자의 상태를 묻는다.


친가든 외가든 어른들은 나에게 "고생한다"고 했다. 그들의 위로 방식이겠지만 솔직히 나에겐 "고생하라. 앞으로도 주욱"으로 들린다. 아빠를 잘 챙기고 엄마를 잘 보좌하라는 압박으로 느껴진다. 아빠의 생존과 엄마의 안위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생'이 필요하다.


나에겐 착한 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나는 착해서 아빠를 돌보지 않는다. 상황이 그렇고 그릇이 되기에 할 뿐이다. 돌봄은 체계적인 업무 수행의 연속이다. 정서적 지지만으로 돌봄이 가능하다면 그게 어찌 노동이겠는가. 그러니 돌봄에 '착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대개는 여성의) 돌봄을 사적인 호의로 깎아내리는 말이다. 대가 없는 많은 노동에 사회는 '착하다' '열정있다' 같은 긍정적 수식으로 퉁치려 한다.


굳이 말하자면 아빠를 돌보는 나에겐 착하다기보다 차라리 강인하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는다. 착하다면 남의 아빠를 돌보고 있겠지.


보호자가 되니 희한 위로와 격려에 자주 노출된다. 얼마 전엔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나도 너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말을 한 사람의 의도가 100% 선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금 소름이 끼쳤다. '너같은 딸'이란 무엇인가. 나이 들고 병 들면 간병해주는 든든한 존재? 딱히 손 가지 않고 알아서 알파걸로 커주는 존재? 아들도 둘이나 있으면서 그 딸이 효녀가 아니어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까. 어찌됐든 사람을 도구적으로 보는 말이다.


그놈의 딸, 딸, 딸, 효녀, 효녀, 효녀. 지긋지긋하다. 효녀라는 말은 대개 어쩔 수 없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계속 그렇게 살도록 기대하는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다. 환우회 카페에 들어갔다가 역시 질려서 창을 닫아버렸다. 암 완치 수기에 쓰여있는 말이었다.

 

딸 아이는 아주 특별한 감정 비타민제입니다

진짜 위안은 나의 감정을 물어주는 이들에게 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내 지분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 때마다 나 자체를 걱정해주는 이들이 나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도 언제든 힘든 때 하소연하라고 말해준 친구, 일체 사교활동이 끊긴 내게 불쑥 전화해 재잘거리는 동료와 선배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브런치로 간병기를 읽고 식사와 수면을 잘 챙기라고 메시지를 보내준 후배... 그들이 멀리서 보내주는 커피쿠폰 하나, 비타민제, 영양음료, 편지 한 통에 담긴 마음을 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을 걱정하는 마음과 살짝 떨어진, 상당 부분 나를 향한 관심이 담긴 우정이 결과적으로 돌봄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럴 때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한 마디를 더 보태고 싶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어쩔 때는 진절머리 나게 진한 법이다.

 

  

*사진 출처는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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