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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Mar 11. 2022

돌봄에는 늘 한 사람이 있다

코로나19가 암 환자와 가족에 미치는 영향


"돌봄에는 늘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떤 돌봄에서든 주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라는 뜻이다. 육아에서도 부모 중 한쪽(대개는 엄마)가 주 보호자가 되듯 암 환자 가족 중 누군가가 이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을 내가 주 보호자가 되고 알았다!).


아빠가 암 진단을 받자 나는 빠르게 역할 분담을 했다. 돌이켜보면 말이 분담이지 이미 나 혼자 선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수술을 앞두고 아빠가 운영하는 사업체 일을 인수인계 받느라 새로운 일을 배워야 했다. 아빠에게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먹이면 안 되는지 고민하고 식사를 차리는 일 역시 오로지 엄마 몫이 되었다. 무엇보다 아빠와 종일 붙어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가 간병이 필요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아픈 가족 옆에 가만히만 있어도 힘든 점은 분명히 있다. 엄마가 병원 일까지 맡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 가혹했다.


아빠를 병원에 데려가고 의료진과 커뮤니케이션 하며 치료 결정에 개입하는 일은 오로지 자녀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엄마가, 병원에서는 내가 주 보호자였다. 보호자라는 이름은 대개 병원에서 불리기에 가족 중 '보호자'는 나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나도 계획이 있었다. 동생들과 당번을 정해 병원에 오가기로 했다. 병원을 간 첫 날 알았다. 이 일은 나누기가 어려운 일이다! 병원에서의 일을 우리끼리 공유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었다. 보호자 한 명이 지속적으로 주치의와 소통하는 편이 아빠의 완치에 더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게 빤히 보였다.


무엇보다 갓 취업해 신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막내 동생에게 회사 일 외에 다른 일을 지우기 안쓰러운 마음이 가족 모두 있었던 것 같다. 둘째는 나름대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아빠에게 거처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여러모로 사회 경험이 더 있는 내가 병원 일을 도맡는 게 적합해보인다고 (사실 아무런 협의가 없었지만) 모두가 동의했다.


억울하고 울화 치미는 때가 많았다. 아빠는 진료과 4개를 외래로 다니고 있기에 병원에 한 번 갈 때 예약시간을 조정하는 일이 매우 복잡하다. 나는 병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예약을 비롯한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고 진료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시간이 훌쩍 넘곤 했다. 아빠가 입원하는 날 쪼르르 동생들도 달려왔지만 그들은 아빠에게 힘내라는 말 외에는 딱히 도움줄만한 일이 없었다(그래서 이후 병원은 나랑 아빠 둘이서만 다니고 있다).


항암치료에 필요한 생활용품 정도는 굳이 내가 아니라 다른 가족이 챙겨도 됐지만 아무도 미리 생각하는 기미가 안 보이기에 그냥 내가 알아보고 주문했다. 동생들이 나만큼 아빠의 암종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그들도 왜 관심이 없었겠느냐만은 내 눈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아빠, 개복 안 하고 복강경으로 수술했대" 전하자 "복강경이 뭐야?" 묻는 막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사회적으로 고립돼갔다. 위로를 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행여 나를 통해 아빠에게 바이러스가 옮겨 붙을까 모든 만남을 뒤로 미루고 사회적 활동을 제한했다. 작가로서 욕심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공사다망해 망설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자니 서러웠다. 나눌 일은 나누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정리해 일을 나누는 것조차 에너지가 들기에 혼자 처리해버렸다. 훗날 동생은 "괜히 우리가 말 보태면 언니가 더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우리는 묵묵히 따르고자 했다"며 미안해했지만 솔직히 속 편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수술을 앞둔 아빠에게 가족들이 쓴 카드. 이때만 해도 우리가 잘 분담하면 별다른 잡음 없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코로나19는 돌봄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병원 진료실에서 안 좋은 얘기를 듣고 가족이 오열하는 드라마 장면은 이제 없다. 진료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 간병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수술 할 때 병원에서 간호·간병을 해주는 병동에 들어갔다. 원래 보호자 면회가 되지만 감염 우려로 입원 기간 내내 아빠는 혼자 지내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일반 병동은 보호자 한 명만 등록이 가능했다. 그말인즉슨 교대 없이 보호자 한 명이 모든 간병을 도맡고 있다는 뜻이었다. 환우회 카페에서는 독박 간병을 하고 있는 보호자들의 비명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비록 엄마가 생활 돌봄을 도맡고 있지만, 의료적 돌봄을 도맡는 나 역시 때로 무척 외로워졌다. 나의 결정이 아빠의 치료에 악영향을 끼치면 어쩌나하는 불안이나 중압감은 결코 다른 가족이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족 관계에는 변화가 생겼다. 초반 서로를 위로하며 다독였던 것과 달리 동생들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라고 회사 일이 중요하지 않겠나. 하지만 아빠를 병원에 데려오고 데려가는 역할을 맡게 된 순간 코로나19는 공포가 되었다. 내가 병에 걸리면 아빠의 치료가 지연된다. 행여 아빠에게 병이 옮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다. 회사에서 확진자나 밀접접촉자가 생겼다는 공지를 할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결국 회사의 배려로(아니, 내가 배려를 요구해) 재택근무를 하게(얻어내게) 되었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나는 아빠의 생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밥을 얼마나 잘 챙겨먹는지, 수술 후 화장실은 어느 주기로 가는지, 지난 밤 몇 시간이나 통잠을 잤는지, 약을 빼먹지는 않았는지 등을 체크했다. 걷기 운동 시간도 대개 함께 했다. 썩 버거운 경험만은 아니었다. 본가에서 서울까지 왕복 4시간을 외래 진료 가는 날이면 소풍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소풍 보내듯 정성껏 도시락을 싸줬다. 차 안에서 오랜만에 아빠와 나누는 신변잡기들이 좋았다. 항암제 부작용인 수족증후군을 예방하려고 핸드크림을 바르려고 하면 아빠는 질색을 한다. 아빠를 달래가며 크림을 바를 땐 아빠가 꼭 아기가 된 것 같아 귀엽기도 했다. 독립한 지 14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스러운 면모를 재발견하는 일이 퍽 재밌었다.


그래서 돌봄은 기회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일하는 동생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주말이라도 본가에 와 지내면 좋으련만 오미크론 변이가 무섭게 퍼지고 있는 시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빠를 보지 않는 일이었다.


상황이 나를 돌봄으로 몰았으나 수동적 희생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나와 아빠는 환상의 팀이 되기로 했다. 진료실에서는 찰떡궁합이 되어 아빠가 그간의 증상을 말하고 의사 소견을 들으면, 나는 진료실에 오기 전 정리했던 질문 리스트를 지워가며 짧은 진료 시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냈다.


항암 치료법을 정하는 결정적 순간(기대만큼 병원에서 모든 걸 정해주지 않는다)에 나는 사전 지식이 있는 보호자였고, 아빠는 자기 의견이 뚜렷한 환자였기에 우리는 덜 부담스럽게 치료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생활 면에서 나는 아빠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되 감시자가 되지는 않기로 했다. 아빠를 돌보면서 자칫 지시적으로 구는 일이 없도록, 돌봄 제공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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