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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Mar 06. 2022

아빠가 암 진단을 받았다

"쫄병암이 아니라 다행이야"

*사진은 암 진단 후 아빠가 그린 그림. 변기처럼 보이는 물건은 대장암 환자의 영혼의 아이템, 좌욕기이다.



여성의 돌봄 제공은 끝이 없다. 내 생애 주기에서 돌봄 제공자가 되는 일은 워킹맘 정도일 줄 알았고 그마저도 내 의지에 따라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돌보는 일은 상상해보지 못했다. 연말 애매한 선물처럼 주어진 아빠의 암 진단과, 크리스마스 이브에 받아든 '보호자'라는 이름. 보호자는 곧 나의 또다른 직업이 되었다. 일하면서 부모를 돌보는 수많은 딸들이 그제야 보였다. 동시에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을 찾다가 결국 내가 쓴다. 워킹도터(working daughter) 이야기.

 

새로운 부서에 발령받아 경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재원을 만났고, 새로운 동료들도 만났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가 생활 반경이 달라졌고, 새 책이 출간 됐다. 새 차도 뽑았다. 정신없는 한 해지만 이 정도면 축포를 터트리며 마무리할 만한 해였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 달 새로운 이름표를 받아들었다. 보호자. 앞으로 최소 5년은 붙여야할 나의 또다른 이름표였다.


그날 한 선배와 점심을 먹었다. 선배는 갑자기 아내가 암에 걸리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간병에 나섰다가 최근 일을 다시 시작했다. 선배의 간병기를 포함한 근황을 나누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남의 일이 아니야. 너도 언젠가 겪을 수 있어.


그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영아, 놀라지 말고 들어... 아빠, 암이래."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 뒤에 오는 1~2초의 침묵에서 나는 극도의 불안을 느꼈다. 암이라는 말에 순간 안도했다. 혹시나 아빠가 사고를 당한 건지 머릿속에선 이미 별별 상상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담담하게 기수는 어떻게 되는지, 병원에선 뭐라고 하는지, 언제 진단을 처음 받은 건지, 보험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등을 엄마에게 체크했다. 전화를 끊고 따지는 듯한 마음으로 낮에 만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마치 그 조언이 저주라도 됐던 양 말이다.


"선배, 저 뭐부터 해야 해요? 아빠가 암이래요." 그제야 울음이 꺼이꺼이 새어나왔다. 그는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 무슨 암이고 몇 기인지 등을 물었다. 때로는 정서적 공감을 얻기보다는 만물박사처럼 해답을 척척 내줄 듯한 사람에게 기대는 편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선배는 1시간 동안 환자 가족으로서의 자세를 일러줬다. 불쑥 물었지만 마치 준비한 듯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줬다. 실체가 모호한 혼란에서, 실체가 뚜렷한 불행의 세계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멘탈 게임이고 마라톤 게임이니 보이지 않는 공포와 잡념과 싸워야 한다고, 자기는 허튼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 뒤통수를 때렸다고, 부모님을 네가 기운 나게 해줘야 한다고, 혹시라도 병원비를 걱정한다면 1년에 수 백만원 정도밖에 들지 않을 거라고, 아빠가 믿고 편히 다닐 병원으로 고르라고,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친절한 가이드가 되는 사람으로 고르라고, 환우회 카페에 들어갈 가치는 있지만 우울한 글들은 절대로 신경쓰지 말라고, 네가 기자인 점을 십분 활용하라고, 일단 치료 정보를 찾아보고 부모님에게 제시하라고, 앞으로 스스로 건강 관리와 체력에 신경을 쓰라고, 무엇보다 혼자 땅 파고 들어가 비운의 캔디가 되어 울지 말라고.


인수인계(?)가 끝나자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이영아,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대장암은 환자 수도 많고 완치 사례도 많으니까 치료 잘 받으면 돼. 그래도 우리는 의사 입만 바라보지 않고 정보를 찾아나설 수 있는 능력이 있잖니. 그건 큰 자원이야". 아빠의 암 진단 후 수많은 선택이 있었지만, 처음 소식을 듣고 그 선배에게 전화한 것은 정말 두고두고 잘한 선택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 역시 나의 큰 인복이었다.


사실 엄마는 암 진단 소식을 일주일이나 늦게 내게 전했다. 직전에 나는 아빠와 크게 다투었고 아마도 내 생애 가장 크게 아빠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온 터였다. 그런 나에게 아빠가 아프다는 소식부터 전해야하는 게 막막하고 마음이 아파서 부모님 둘이서만 걱정을 끌어안은 시간이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말하는 순간 알았다. 나는 아빠를 오랜 시간 미워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음을. 엄마의 미래는 조금 신산해질 것임을. 나는 더 철든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임을.


딱 이틀만 울고 나는 '보호자 모드'에 들어갔다. 그토록 벗어나려했던 장녀 자리로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병원도 의사도 내가 알아보고 있었다. 아빠에겐 "아빠, 내가 최고 좋은 병원에서 수술 받게 할게. 꼭 낫게 할게" 했다. 아빠는 가족 단톡방에서 "아빠가 아파서 미안하다"며 "치료 잘 받고 웃으며 살자"고 했다. 오랜만에 따뜻한 얘기가 오갔다.


대형병원 초진을 예약해놓고 우리는 나름대로 불안한 시간들을 언어 유희로 날리려 했다.


"쫄병암이 아니라 (대장암이라서) 다행이야"

"(팔뚝을 쓸어내리며) 나 암(arm) 환자야!"

"완치가 가능한가요?" "암(癌), 그렇고 말고."


그리고 202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수술일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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