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몇 년 전 친구가 한 말이 맴돌 때가 있다. 결혼의 장점이 다른 것도 아니고 운전대를 잡는 일이라니. 그것도 뒷좌석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고. 만약 친구가 5년만 늦게 결혼했어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서른줄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체력이 달려서 차를 모는 일을 고려하게 되니까. 굳이 육아가 아니더라도 운전대는 내가 잡아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니까.
또 다른 친구는 “남편의 가장 큰 역할은 벌레잡이지”라고 했다. 여름에 실수로 쓰레기통에 버린 과일 껍질에서 정체모를 벌레의 알 수십 개가 부화했을 때 내가 거의 울면서 연락하자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마도 친구 남편보다는 믿을만한 세스코에 먼저 전화를 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오는 데 하루 이틀 걸린다는 말에 포기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이는 나뿐이다. 울며 불며 생난리를 치며 결국 다 치웠다. 이렇게 나는 완벽한 자웅동체 부부 미션을 하나 더 완수했다.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는 기혼 친구들은 남편과 같이 살 때 덜 불안하다고 했다. 나는 궁금하다. 빌라에서 아파트로 주거 형태를 옮겼을 때 내가 느꼈던 안전한 감각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효용이 큰지. 남편의 존재가 아파트로의 이사 이상의 안전감을 담보할 수 있으려나.
기혼 친구들이 자조적으로 말한 ‘남편의 쓸모’는 크게 치안과 궂은 일로 요약된다. 치안은 어느 정도 돈으로 해결되는 면이 있고, 궂은 일 역시 그렇다. 에어컨 청소나, 수도배관 교체 같은 일은 요즘 남자들도 뚝딱 할 줄 아는 기술이 아니며, 사실 숨고에서 손가락 몇 번만 놀리면 몇 만원 내외로 친절한 전문가의 도움을 빌릴 수 있다. 자질구레한 궂은 일은 그냥 내가 하는데, 혼자 사는 삶의 장점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닌 정도다.
물론 그들이 내게 말한 결혼 생활만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저 오랜 결혼 기간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가사 노동과 육아로 지친 심신을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배우자와 삶을 꾸리겠다고 결심한 순간에는 사랑하니까 오래 같이 있고 싶었을 것이고, 서로의 미래에 함께하는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배우자의 쓰임새를 보고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러는한편, 어쩌면 내가 20대 때 결혼하게 되면 갖추리라 생각했던 거의 모든 삶의 편의는 실은 혼자서도 획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남편이 있어도, 내가 해야할 주방 일이 음식물쓰레기 처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2인분으로 늘어난다면? 실은 꽤 재밌는 활동인 운전을 하고는 명절 날 생색내며 드러눕는 남편이라면(마치 과거 우리네 아버지처럼)? 남편이 해주는 궂은일만큼 아내로서의 나에게도 기대되는 역할이 있다면? 이런 반대급부는 생각하지 않았던 20대였다.
소위 결혼적령기에 무언가 새로운 삶이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휩쓸리듯 시작한 결혼도 있다는 걸 알기에, 미래 배우자에 대한 기대만 컸던 어린날 결혼하지 않은 게 다행인가도 싶다. 남편의 쓸모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가까워질수록 만약 결혼한다면 내가 기대하는 바도 단 하나, 사랑으로 귀결되는 점은 비혼 혹은 만혼의 긍정적 결과가 되지 않을까.
새로운 삶의 기술을 익혀 일상의 편의가 커질수록 과연 남편이 필요한가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운전하는 남편 같은(여자가 운전대를 잡기 시작한 역사가 얼마나 짧은지 되짚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