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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Dec 30. 2019

2019년 나를 살린 말(言)들

연말 결산 글쓰기

행복의 낙차(落差)에 아찔했던 한 해였다. 죽고 싶지도 않지만 그닥 살고 싶지도 않은 날들이 이어진 끝에, 감당하지 못할 행복감에 절여져 불안한 황홀경을 맛보기도 했다. 돌고 돌아 무표정한 얼굴, 감정이 ‘0’인 상태가 되었다. 걱정 없고 평온한 상태를 권태롭다고 착각하는 배부른 상황이다.    


올 초 내 생애 모든 용기를 쥐어 짜 집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 상처받는 편이 집 안에서 질식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나간 직장에서 한동안 부당한 미움을 흡수했다. 모멸감을 견딜 수 없는 날에는 지칠 때까지 뛰었다. 숨 찰 때까지 몰아붙여야 겨우 숨 쉴 수 있었다.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방법은,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이쑤시개로 찔러대는 것이라던가. 나의 임계점을 시험하듯 찔러대는 이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단도(短刀)로 그랬다. 혼자 웅크리며 버텼다. 그 무렵 악몽을 자주 꿨다. 꿈에서는 가끔 모두가 친절했다.     


여름이 되자 나를 둘러싼 상황이 우호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동료들이 미덥게 느껴졌고 일에서는 성과가 났다. 이런 상황에 사랑까지 해도 건지 되물을 정도로 얼떨떨하게 행복해졌다.     


자정쯤 퇴근해 ‘그’가 문 앞에 걸어놓은 호박죽을 철퍼덕 주저앉아 퍼먹는데 퍽 위안이 됐다. 말하기 힘든 굴욕감이 드는 날에도 그가 끓여준 백숙을 먹고 말끔해진 기분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간혹 나의 세계가 이해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지 못할 거란 생각에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토니라는 고양이와 처음으로 교감했고, 내가 심각한 수준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별 후 한동안 그만큼이나 그의 고양이를 그리워했다.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의 선(善)함과 가끔 만나는 사람들의 섬세한 언행 덕분에 순간순간을 넘겼다. 베트남 후에에서 만났던 A는 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다. 길거리에서 1000원짜리 국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작별의 의미로 포옹을 했는데 그 온기가 나를 한동안 먹여 살렸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만난 B는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삶은 언제나 ‘the best worst(차악?)’를 선택하는 거라고 했다. 그는 나고야로 일자리를 찾으러 떠나며 “내가 본 넌 항상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너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내 표정을 돌아보게 됐다. 같이 수채화 수업을 듣던 C는 운동을 마치고 온 나에게 “기분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비유적인 칭찬은 여운이 강했다. 며칠 같이 지낸 대학생 D는 진로를 언론인으로 바꿨다. 내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누구는 나를 보며 미래를 그렸다. 자부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한때 나의 오랜 관계들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에 너무 오염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건강해(져)서 덜 불행했다. 별 말 없이 밥 먹자고 나를 불러낸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과는 같이 시간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전환되곤 했다. 하루 종일 떨어질 줄 모르는 촌조카에게 “승율아, 넌 왜 이렇게 고모를 졸졸 쫓아다니니?”라고 하자, “왜냐면 고모가 좋으니까”라며 배시시 웃던 얼굴을 떠올리면 미소가 삐져나온다.    


뭉근하게 힘 되는 말은 나를 지켜봐온 이들이 잘했다. 후배 E는 “선배처럼 한없이 퍼주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고, 또 다른 후배 F는 “보석 같은 언니가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선배 G는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조직에 상징성이 크다”고 의미를 짚어주었다. 몇 년 전 내부고발자로서 인터뷰했던 H 선생님은 나를 “업무를 넘어 진심으로 대해준 유일한 기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생 대노잼 시기'를 지나던 중 출판사 I 대표님이 "역시 참 재밌게 사셔요"라고 한 말에 그런대로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서로 엮이지 않는 지인 세 명이 마치 짠 듯이 나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불러준 날이 있었다. 동기 J는 꽤 오랜 기간 나의 푸념섞인 말들을 경청해줬다. 이게 다 내가 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내가 나를 응원해본다.


말이 나를 죽이고 살렸다. 지금은 나를 살린 말들만 떠오른다. 지난 사랑에서 ‘사랑하니까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나란 인간의 마음이 좁아지기만 해 버겁기만 하던 때를 겨우 지났다. 이제는 나도 다른 이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주는, 적확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 기술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성숙함의 척도가 아닌가 싶다.     


내가 나를 구제하는 경험, 이것보다 더 큰 성취는 없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은 근거로 일상의 항상성을 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 속에서도 일주일에 두 번은 운동을 나갔고, 매일의 끼니를 잘 챙겨먹었다. 체적으로 강인해질 때마다 마음 근육이 커졌다. 반복되는 이별에도 여전히 사랑의 힘을 믿으며 산다.     


내 삶이 고속도로는 아닐지언정, 손에 흙 묻혀 가며 돌 치우고 바닥 다지는 숲길이라고 생각키로 했다. 손에 생채기 좀 났지만 맨발로 걷기는 한결 편한 나의 길을 내년에도 사랑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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