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에 구속받지 않을 자유
얼마 전 콘서트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의 영상을 봤다.
그게 뭐 그리 인상깊은 일일까 싶지만, 다들 노래 부르는 가수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담기보다는 영상에 담으려고 카메라를 보고 있기에 그 사람의 아이컨택이 눈에 띄었다.
새해 즈음엔 타임스퀘어 카운트다운 현장이라며 올라온 사진을 봤는데,
2000년엔 다들 함께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포옹을 하거나 입맞춤을 하는데,
2024년엔 손에 핸드폰을 들고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타임스퀘어는 아니지만, 나 역시 좋은 걸 보면 눈으로 담기보다 일단 찍어를 외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다시 들여다 본 적은? 사실 거의 없다.
그냥 핸드폰 안에 그 순간을 담아 놓는 게 전부다. 언젠가 보겠지 하면서.
그렇다고 다시 안 올 순간을 기록하지 않고, 눈으로만 보기엔 마음이 불안하다.
나중에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데, 사진이라도 있으면 다른 걸 보면서 다시 볼 수도 있는데,
사진마저 없으면 그냥 날아가 버릴까봐.
하지만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때 어떤 일이 있어 났는지는 기억 나지만, 그 사진을 찍을 때의 감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던 그 순간과 그 마음이 남아, 정작 그 순간에 대한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다.
순간을 가지려던 노력이, 그 순간의 마음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가지려는 행동보다 가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노력을 기울인다.
전엔 물건을 잘 샀다. 충동구매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자꾸 쓰고, 잠깐 썼다 버리길 반복했다. 집이 좁으니 오래 가지고 있진 못했다.
그래서 정한 기준,
하나를 사려면 하나를 버려라.
물론 기준을 정한 후에도 실천하지 못한 적이 많다. 왜냐면 사고 난 후 버리려고 하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
지금은 버린 후에만 산다.
집이 자꾸 좁아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못해서다.
언젠가 쓸 것 같으니까,
내 손때가 뭍었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버리지 못한다.
오죽하면 정리지도사라는 직업까지 나왔을까.
가지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버리기부터 시작한다. 그럼 버리지 못한 자리에 새것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그런데 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처음부터 가지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법륜 스님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기본적으로 갖고 싶은 욕망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갖고자 하는 마음, 그 당연한 마음을 버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혹시 지금 가지지 못해서, 또는 갖고 싶어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있다면,
일단 그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가지고 있는 하나를 버려보는 걸 추천한다.
그럼 어쩌면 갖고 싶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꼭 갖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