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8. 베를린 장벽 앞에 서다

분단의 역사 현장에 가다

by 의미공학자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같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더 익숙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 중이지만 통일이 된 독일에서 그 상징적인 곳을 방문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임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직업군인으로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친구 김우형 소령이 근무하는 강원도 화천을 찾았었다. 나는 친구를 따라 칠성전망대라는 곳으로 갔다. 덕분에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전방까지 가봤다. 전망대에서는 멀리 북한의 민둥산이 보였다. 철조망을 경계로 남과 북은 분단되어 있다. 그곳에 섰을 때 나는 새삼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다.



베를린에 도착한 이튿날 나는 베를린 장벽 앞에 섰다. East side gallery라고 철거되지 않은 1.3km 길이의 베를린 장벽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총일 직후부터 총 21개국 118명의 예술가들에 의해 그림이 채워 완성된 갤러리라고 한다. 슈프레 강을 따라 걷다가 East side gallery를 따라 계속 걸었다. 냉전을 상징하는 예술 작품들이 계속 이어진다. 독특한 그림을 사진으로 담아본다. 벽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베를린 장벽을 더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라는 곳으로 향한다. 이곳은 동서독 분단 시절, 미국이 검문한 서베를린 지역의 국경 검문소이다.



통일 후 동서를 가른 모든 국경 검문소는 철거되었지만 체크포인트 찰리는 관광 상품으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검문소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박물관 근처 곳곳에는 장벽의 일부를 그대로 걸어둔 모습도 보인다.



이제 베를린 장벽이 있던 분단 선 앞에 선다. 벽은 허물어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세웠다. 그전까지는 왕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자유를 찾아 서베를린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동독 정부가 세운 43km에 달하는 장벽을 세웠다. 나는 지금 그 장벽의 흔적 앞에 서 있다.



이주를 차단하자 동독에서는 자유의 외침이 커지고 체코로 월경하는 난민이 늘었다고 한다. 이에 동독 정부는 ‘난민의 서독 방문을 허락하겠다’고 발표하는데 이것을 언론에서 ‘즉각적인 서독 방문 허락’이라며 잘못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베를린 사람들은 즉시 장벽을 부수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사실상 장벽이 붕괴되고 국경 초소가 개방되었다. 장벽의 공식적인 철거는 1990년 6월, 그리고 그해 10월 3일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행책 <프렌즈 독일> 94p 참조)


독일에 와서, 그리고 베를린에 와서 본다. 베를린 장벽.


박물관에 있던 장벽을 허물기 전, 후의 모습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7. 아인슈타인이 교수로 활동한 대학교에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