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정
흔히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최고로 치지만, 나는 지금도 연정 씨가 애쓰는 사람이란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애쓰는 연정 씨가 좋다. 나에게 연정 씨는 제 기준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를 공부하고 배우며 더 정확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연정 씨는 학교에서 만났다. 연극반 활동이 끝나고 허전함에 들어간 시학회였다. 학회에서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그중 첫눈에 좋은 사람이라고 안 것은 연정 씨였다. 다정하고 올바른 사람. 세상의 그 무엇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 연정 씨가 있기 때문에 그 학회는 좋은 학회였고, 그날의 분위기는 편안했으며, 그 공간은 차분하고도 쾌활했다.
그날 또 하나 첫눈에 알았던 것은, 연정 씨는 애쓰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연정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주 많이 애쓰고 있었고, 그래서 마치 그렇게 훈련이 된 사람 같았다. 그것은 가식도 위선도 아닌, 아주 오래되어 인이 박인 담담한 노력의 결과. 하지만 그 훈련된 균형감각의 틈으로 흐르는 연정 씨의 마음을, 덥석 손 내밀어 잡고 싶다고 생각했다. 흔히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최고로 치지만, 나는 지금도 연정 씨가 애쓰는 사람이란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애쓰는 연정 씨가 좋다. 나에게 연정 씨는 제 기준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를 공부하고 배우며 더 정확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연정 씨를 볼 때면 꽃이 핀 봄날 밤 같다고 생각한다.
봄은 매번 만나면서도 새롭게 놀라는 아름다움이다. 언제나 겨울의 추위가 채 가시기 전 들이닥쳐 사방을 포위해 온다. 여기저기서 폭발하듯 터지고 잠시 멈추었다간 금세 줄줄 녹아 흘러버린다. 온화하게 파란 하늘과 뒤얽힌 봄은 고요하게 공격적이고 성급하게 정적이다. 섬세하고 또한 그보다 압도적인 모습. 그래서 봄은 자꾸만 정신을 차려보면 한순간에 여기 와있다.
그러나 봄꽃이 핀 밤은 다르다. 밤이 되면 봄은 어쩐지 낯선 모습을 한다. 애초에 봄이 그렇다. 마냥 예쁘고 다정하면 좋으련만 동시에 어딘가 을씨년스럽고 싸늘한 계절이다. 가로등 빛 아래 가만히 자리한 벚꽃 잎은 꼭 무언갈 놓친 내게 시치미를 떼는 것 같고, 까만 하늘에 파드득 흩뿌려진 꽃봉오리들은 요란하지 않아도 마음을 흔든다. 봄의 추위는 뼛속까지 시린 것처럼, 봄에 앓는 병은 마음까지 아프다. 봄날의 밤은 다정한 봄을 예사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시간이며, 봄은 조용히 오지만 마음에 박히듯 온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다.
연정 씨는 조금도 싸늘한 사람이 아니지만 봄꽃이 핀 날 밤을 걸으면 맡을 수 있는 봄의 단정한 기운을 닮았다. 봄을 나는 사람은 이 봄이 내일이면 떨어질까 아쉬운데 정작 봄 스스로는 비바람을 아랑곳 않는 담대함을 닮았다.
연정 씨는 숨김없는 사람인데도 아주 천천히 알게 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 취향과 선택을 조금씩 알아가며 즐거워진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연정 씨를 좋아하는 만큼 그를 알지 못하고, 내가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는 연정을 통해 너무 많이 다가가지 않고도 한 사람을 아끼는 법을 배웠다. 한때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건 덧없다고, 책임지지 못할 너무 긴 마음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연정 씨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약하지만 무력하지 않은 다정으로 설 수 있다고. 지금도 나는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시간에 함께 있고자 할 뿐이다.
겹겹이 쌓인 봄의 기억들을 뚫고 해마다 새로 나는 절박함이 봄꽃에는 배어있다. 절박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미련이 없다. 그건 세상이 봄을 맞는 모습과도 닮았다. 어떤 일을 겪었어도 봄은 온다. 누구에게나, 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든 아니든, 꽃은 피고 진다. 그것도 아주 한순간에.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오는데 목련이 피는 것을 발견한다. 아침만 해도 맺히는 줄도 보지 못했던 그 자리에. 봄은 언제나 이렇게 한순간에 오고, 그렇지만 아주 애써서 오고 있는 것. 나는 연정 씨 덕에 애써 오는 봄을 애써 맞는 마음을 안다. 연정 씨를 만날 때면 봄밤이 오가는 길을 또박또박 걸어 더 힘주어 살아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