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우리아빠가술취하신모습으로한손에는스케치북을사가지고오셨어요
유년 시절은 내게 몇몇 장면으로 남아있다. 이건 기억이라기보다는 각인과도 같다.
몇 컷 남아있지 않은 유년시절의 장면 중, 내가 종종 재생하고 있는 장면 하나가 있다.
몇 년도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니, 대략 199X년. 그 당시 아빠는 고군분투하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한창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공부도 병행하고 있었으며, 애들은 커가고 들어갈 돈은 점점 많아지던 시기였으니.
그 날은 내 생일 당일, 혹은 며칠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날 밤, 아빠는 약간 취한채로 집에 들어왔다. 그 시간 아직 안자고 있었던 나는, 아빠한테 인사를 하러 거실로 나왔고, 평소에는 거의 본 적 없던 아빠의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약간 당황했다. 술취한 아빠의 몸은 약간 비틀비틀, 눈은 반쯤 뜬 상태였다. 아빠는 몸을 겨우 지탱한 채, 비틀거리는 손끝으로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생일 선물이다
아빠가 건넨 건 번들로 된 스케치북. 5개가 하나로 묶여져있는 16절 스케치북이었다. 그 스케치북의 표지에는 공주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웨딩피치나 세일러문이 아닌 고전적인 공주 그림이었다.
난 그걸 받고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생일이나 선물같은건 낯뜨거워서 잘 챙기지 않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다. 엄마가 사주거나, 나랑 같이 가서 고른 선물이 아닌, 아빠가 스스로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왔던 건 그 날이 난생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겨울밤에 술에 취한 채로 문방구에서 스케치북을, 그것도 표지에 공주가 그려져있는 스케치북을 구입했을 아빠를 상상하니 뭔가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술에 취한 아빠의 모습과 스케치북 표지에 그려져있었던 공주의 모습이 참 이질적이라, 약간 웃기기도 했다.
헤롱헤롱한 아빠가 내게 스케치북을 건넨 모습.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 스케치북을 받아들던 나의 모습. 놀랍고 웃기고 귀엽고 한편으로는 짠한-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나의 모습. 이 모든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게 각인되어 있다. 20여년이 지나도 이렇게 새겨진 장면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유년시절 아빠와는 좋았던 기억보다 안좋았던 기억이 많다. 아빠는 내게 감정적인 의존을 많이 하곤 했는데 어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 때의 아빠 나이와 가까워져가는 어느 시점부터 나는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빠는 참 고단했고, 또 고독했겠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풀 곳이 없어서 답답했겠다. 그래서 나한테라도 그렇게 풀었겠다..'
아빠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기 전에, 문득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를 때면, 난 황급히 머릿 속에 펼쳐진 화면을 꺼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나서는, 마치 어린 시절 사진앨범을 꺼내보곤 하는 것 처럼 난 내 기억 속 아빠와의 유년시절 장면을 종종 회상하곤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을 재생할 때면 느낄 수 있다. 추운 겨울날 주머니 속 핫팩을 꼭 쥐었을 때 손에 전해오는 그 따스함이, 내 가슴 안에 번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