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화되지 못한 무의식은, 어떻게든 운명처럼 외부에서 일어난다.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유만수(이병헌). 그의 의식적인 욕망은 '식구들의 입에 밥을 넣어줘야 한다'와 같은 가장으로서의 숭고한 신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파괴에 대한 욕구'에 있었음을. 그 무의식적인 욕망이 '해고'라는 도발적인 사건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음을.
그는 왜 제지회사를 고집했을까? 가족들을 지킨다는 명분이라면 다른 일을 해도 되었다. 실제 이런 싸인들은 영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내(손예진)는 1년이 넘게 제지회사에 재취업이 안되는 그에게 “제지공장 말고 다른 공장은 안되나?” 라고 떠보기도 한다. 고시조(차승원)가 제지회사가 아닌 신발가게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구범모(이성민)을 죽이려할 때는 구범모를 향해 ”카페가 뭐어때!“ 라고 자아배반적인 포효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다른 가능성들을 곁에 두고도 무조건적으로 제지회사만을 고집한다. 왜 꼭 제지회사여야만 했을까?
종이는 나무를 파괴해서 만든다. 그는 습관적으로 "제지회사가 나무를 막 파괴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이 굳이 필요없는 순간임에도 말이다. 어떤 사람이 기계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면, 그의 무의식은 그 반대로 동작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대부분 옳다.
제지 회사에 재취업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경쟁자를 파괴(살해)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여기엔 별다른 고뇌나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적이 먼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적을 죽였던 것처럼. 돼지 농장을 하던 아버지가 돼지를 땅에 파묻었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그는 '어쩔 수가 없다' 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이 영화가 속편이 나올리는 없겠지만, 앞으로 그의 운명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결말을 만나게 될 것임에 자명하다. 의식화되지 못한 무의식은, 어떻게든 외부에서 운명처럼 펼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본 나의 소감이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2013년에 나온 <스토커>를 가장 좋아한다. 아마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덜 유명한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개봉 당시,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4번 봤다. 이후 OTT로 나왔을 때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몇번이나 봐도 언제나 참 아름답고 희망찬 영화다.
<스토커> 주인공 '인디아'는 <어쩔 수가 없다>의 '만수'와 어딘가 모르게 유사하다. 둘 다, 부모의 카르마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과, 둘 다 파괴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둘 다 아버지의 총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만수'와 '인디아'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인디아'는 종국에 자기 핏속에 있는 파괴적인 성향을 수용하며, 무의식을 의식화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온전히 자유로워진다. 비록 그녀가 앞으로 살인자의 삶을 살게 되는 운명일지라도 말이다. 오프닝씬과 이어지는 마지막 씬에서, 홀로 숲에 서서 짓는 그녀의 미소는,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보여준다. <어쩔 수가 없다> 의 만수가, 결말부에서 가족에게 보여주는 인위적인 웃음과는 대비된다.
내 귀는 남이 못 듣는 걸 듣고
내 눈은 남이 못 보는 작고 먼 곳의 것을 봐
이런 감각은 오랜 열망의 산물이야
구출되거나
완성되고 싶은 열망
바람이 불어야 치마가 날리듯
난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뤄지지 않았어
어머니 블라우스 위로 아버지의 허리띠를 했고
삼촌에게서 받은 구두를 신었거든
이게 나야
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걸 깨달아야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 스토커(2013) 오프닝 시퀀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