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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향 Apr 15. 2021

 알코올의존증과 언어폭력 남편

내 나이 마흔 이제부터 시작이다

 20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고 행복해 보였다. 행복하고 싶어 결혼을 선택했다. 내 나이 서른 아이가 생겼다. 부랴부랴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은 지옥이었다.

남편은 술을 먹고 한 번 트집이 시작되면 잠을 재우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고 반박하지 못하고 듣고

있어야 했다.

언어폭력은 사람을 치욕스럽게 만든다.


"집안이 왜 이 모양이니?"

"너는 이대로 살면 안 돼?


나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고 강요했다. 이해 안 되는 트집이 한번 시작되면 새벽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언어폭력으로 괴로웠다. 무서워서 맞서지 못했다. 죄인처럼 앉아서 듣고 있어야 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맞고 자랐다는 말을 들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듯하다. 서로가 상처가 있는 사람이 만나 미성숙했다.


"행복하고 싶은데 내 인생은 왜 이모양이지?"  

"혼자 살 것을 결혼을 왜 했을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은 침울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결혼생활은 슬프고 외로웠다.

혼자 울다 잠든 날이 많아졌다.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졌다. 무기력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내 상황을 말할 수가 없었다. 쪽팔렸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점점 멀어져 갔다. 남편은 직장도 관계에서 틀어지면 참지 못하고 그만뒀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더 힘들어졌다. 빚지고 살지 말자는 주의라 매달 마이너스 생활이 싫었다.


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숨이 막혔다.

매일 아이 유모차를 끌고 집 앞 공원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공원에서 아이와 있는 시간이 잠깐이나마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내 곁에 딸아이가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아이가 있어 감사했다.



 아이 4살 무렵 일이다. 남편은 화가 났는데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몰랐다. 아이 때문인 듯했다.

 주방놀이 장난감을  집어던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아이가 설령 잘못을 했더라도 화가 날 수도 있다.

감정조절을 못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혼 초기에도 밥상을 뒤엎은 적이 있었고

임신 중에 뒤통수를 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분노조절장애인줄 알았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방문을 주먹으로 쳤다. 방문은 움푹 파이고. 그 순간 무서워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가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닌듯하다. 남편은 아이에게 벌을 세웠다. 장롱 뒤에 서있으라고 했다. 아이는 큰소리에 놀랐다. 무서웠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 그쳐"

"그치지 못해"

"울음 안 그치면 때린다”


아이 울음이 거세졌다.

아이 머리를 철석 철석  때렸다.


“너 오늘 잠자지 말고 계속 서 있어 “라고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남편유 말릴 수 없었다. 무서워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슴이 지져지게 아펐다

4시간이 흘러서야 아이는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안아주지도 말고 혼자 누워 자라고 해.

이불속에서 아이 손만 지긋이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했다. 아이를 도와주지 못한 나는 엄마도 아니야!

아이 옆에서 눈물만 났다.


왜 이혼을 생각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참고 살았을까?


 남편의 행동이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누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술에 의해 일어나는 문제인 걸로 알고 찾아간 곳이다. 알코올센터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이곳을 다니면 지금보다 삶이 좋아질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센터장님은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술을 끊을 수 있는 단주 모임이 있었다. 가족이 치유하는 가족 모임도 있다면서 권유를 하셨다. 다음날 바로 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은 모른다.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내가 막내였다. 젊은 나이에 다닌다는 것이 쑥스러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것을 이곳에 가면 언니들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어서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가면 편안했다. 누구에게 말 못 하고 끙끙거렸던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는 곳이었다.


 매주 명상 선생님 수업을 들었다. 명상이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답답했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다. 서로 다른 배우자의 고충을 들으면서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리 장애를 가져 목발을 짚고 다니는 언니가 있었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하셨다. 술을 먹으면 언니와 아들에게 심한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집에서는 통제가 되지 않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했다. 수시로 병원을 왔다 갔다 하시는 분이셨다. 알코올 중독이 가족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이 참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느꼈다. 심하신 분들에 비하면 난 괜찮다 싶었다. 앞으로는 남편 행동의 동요되지 않고 대처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하는 행동이 나와 분리될 수 있도록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물건을 던져서 부서진 것들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남편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기르기로 했다. 


 주일마다 교회 가서 하나님이 남편을 변화시키고 원만한 가정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라고 울며 기도했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행동은 변화가 없었다. 상대방은 변화가 없는데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의 불편한 행동을 말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편함을 참고 살았던 것이 성격으로 굳어버렸던 것.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는데.

알콘센터 가족모임을 다니며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내면의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는 가정폭력 상담소를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알았더라면 이혼을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알코올센터를 다니며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나 혼자 노력을 한다고 해서 가정이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내가 우습게 보였기 때문에 화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본인도 잘못을 알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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