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떴을 때 나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창 바깥이 흐릿하게 밝았기 때문에 새벽이 거의 다 지났다는 것을 차츰 인식할 수 있었다.
새벽 6시 40분이었다. 계산해 보니 그래도 6시간 정도가 지났고, 잠이 더 오지 않았고,
하늘에 해가 뿌연 공기와 겹쳐져 새빨갛게 붉어서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담요를 개서 치웠다.
그리고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 다시 아오이를 생각하면서 ㅡ 당신은 반듯한 사회인이 아님이 상기되어 오후의 목욕을 한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늘 당신이 무감하다고 생각되지 않고 흔들리며 강하다고 생각되었다 )
조도 낮은 등을 켜두고 문을 닫고 나왔다.
물이 받아지는 30분 동안 희뿌옇고 조용한 거실에서 이를 닦았다.
붉은기가 가려 사라져 있었다.
욕조는 희고 물은 투명한데
목욕 물을 받으면 푸른색이 된다.
최대한 뜨겁게 물을 받아두고 들어갔더니 발등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는데 그냥 그대로 들어갔다.
정강이까지 물에 들어간 채로 출렁이는 물 위로 차가운 물을 틀어 넣었다. 손날과 손바닥으로 원을 그리며 휘저어 물을 섞을 때는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
숨이 깊이 흩어질 정도의 온도가 되었을 때 접어놓은 수건을 욕조 가장자리에 올리고 그 위에 핸드폰을 두었다. 한동안 샤워할 때 듣던 노래를 중간 정도로 작게 틀고 몸이 잠기게 누웠다.
희뿌옇고 어두운 아침의 목욕.
여덟시 반에는 욕조에서 나와야 제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나는
느른한 몸이었다
가끔 코끝만 나오도록 완전히 몸을 잠기면 음악소리는 진동처럼 변하고 물속에서는 내 심장소리가 고래처럼 들렸다. 물속에서 빠져나와 욕조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팔을 포개 머리를 가누면 수면 아래 내 몸이 보였다. 작게 음악이 들렸고 나는 십오 분에 욕조에서 나왔다.
물이 빠지는 동안 현기증을 지우려고 욕실 밖의 사늘한 공기를 쐬며 잠깐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몸이 남아 있었다.
늘 보던 밝은 시야와 노곤한 몸을 느끼면서 가끔 일찍 일어날 만하다고 생각했다.
2.
편두통이 왔었다.
이제 편두통이 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머리 한쪽 끝이 알싸하고 무겁게 아프기도 하고, 진통제를 먹어야겠다 싶기도 하지만
꼭 속이 뒤집힌다
ㅡ 누가 그랬는지 선생님이 그랬는지 ㅡ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편두통이 오면 몸이 리셋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몸의 대부분에 통증이 오고 뒤집어지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
그럼에도 리셋이라는 말이 생생해도 서럽지는 않고
기민하게 감각하는 법을 배워 다행이다
날씨가 차갑고 좋았음에도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며칠째 집에 오면 그대로 누워버렸다
두세 개의 세계를 오가던 일은 2주 전에 끝났다
카메라와 글과 CMC와 시험과 녹음 ... 밤의 차가운 바람을 이고 있는 복권 판매점을 몇 번 지나쳐 걸었고
( ㅡ뭐야 저건? ㅡ저기서 1등이 많이 나와서 줄 서 있는 거야 )
가끔 땅동 짧아지는 머리와 달라지는 입술색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 어깨가 자주 아렸고 그것으로 많은 일을 했다
한 시간이 늘 촘촘하게 흘러가고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들어오기만 하면 혼곤하게 기절했다
가능한 날에는 열두 시간을 꼬박 자기도 했다.
3.
정말 끝내주는 핫초코가 있는 카페를 찾았다.
재즈 같이 어둑하고 드로잉과 포스터, 음악이 많은 곳이다.
이 카페 사장님은 늘 '오셨어요?' 하고 머그컵을 돌려드리면 '조심히 가세요!' 라고 인사하신다.
그리고 내가 핫초코를 주문할 때마다 '쪼코로 드릴까요?' 하셔서 나는 조금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들지만 나쁜 쪽은 아니다.
냅킨의 무늬까지 익숙하고 사랑스러워할 만큼 몇 번 갔지만 실은 이곳에서는 에스프레소와 핫초코밖에 마셔보지 않았다. 에스프레소도 맛있지만 머그잔의 넓음과 식도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이 좋아서 긴 테이블 위로 팔을 쭉 뻗으려면 핫초코를 마셔야 한다. 우유에 초코 탄 맛이 아니라 초콜릿이 녹은 맛이 나는 핫초코라니 진짜 귀하고 끝내준다.
일도 많아 바쁘고 돈이 나갈 일이 많아서 심각하게 이곳을 가야 하나 고민한 날이 있었는데 애가 이렇게 가고 싶다잖아! 속으로 외치면서 결국 간 하루도 있었다. 그리고 너무 좋았다. 그게 잠깐 우습다가 나무 테이블 위로 팔을 늘여 기대면서 조금 더 이해했다. 커피 값을 줄이라니,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했던 정은 작가의 말.
ㅡ 카페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는데 골목 끝의 카페 앞에서 상자와 물건들이 내놓아지는 것이 보였다. 도돌한 흰색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과 거대한 유리창이 있는 이곳은 내가 무척 좋아했던 곳인데 며칠내 어수선하고 닫혀 있어서 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마침 사장님이 나와 계시길래 물었더니 문을 닫는다고 하셨다.
- 종종 오던 분이시죠. 기억에 남아요.
허물어가는 카페 안에 서서 잠깐 이야기했다.
사장님은 그래도 커피라도 타드리겠다며 가져가시라고 컵에 얼음과 함께 커피를 타주셨다. 벽돌 같은 붉은빛에 로고. ( 그건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먹은 아메리카노였고 )
인사를 하고 나와서 골목을 빠져나가다가 다시 돌아 들어가 말했다 - 가끔 친구들도 데리고 왔었고, 혼자도 왔었고,
제가 여길 좋아했다고 그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하고 절취선이 보이는 것처럼 없어진 물건들의 자리를 자꾸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기회 되면 또 뵐게요, 다른 데 여시면 찾아 갈게요,
조금 말하고 돌아왔다.
4.
W 교수님을 만났다.
내내 뵙고 싶어서 두어 번 찾아갔었는데 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어제는 사무실을 가는 길에 호로록 정문 쪽에 있는 건물을 들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교수님이 보이길래 얼른 불렀다 - 잠깐의 시선 이후 W 교수님은 제자리에서 거의 뛰듯이 놀라셨다
ㅡ아니 어쩐 일이에요? 이렇게 우연히 마주쳤는데 잠깐 얼른 들어와요.
저한테는 우연이 아니었는데요 ... 하는 말을 삼켰다
교수님은 내 머리를 예쁘다고 하셨고
(이 짧은 머리는 보는 사람마다 예뻐해줘서 몇십 개의 부재중 전화를 찍어놓던 오래된 집의 당신만 생각나게 했다. 당신들은 혹시 내가 귀엽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라도 하시나요?
1년 만에 다시 간 작은 식당에서 두 사장님들은 '머리가 짧아져서 못 알아봤잖아요. 예뻐요.' 하셔서 깜짝 놀랐다. 나는 다시 그곳을 뻔질나게 가고 있고 지난주에는 파 들어간 계란말이를 깨끗이 먹었다.
사장님 저요 사실 너무 힘들 때 너무 뜨거운 밥 먹으러 여기 와요. 여기가 없어지지 않아서 진짜 다행이에요.
만약 로마의 사장님을 뵙는다면 그 분도 차분한 얼굴로 예뻐해주실까?)
W 교수님과 한 짧은 대화
ㅡ전 제가 그래도 편한 예술에 빠졌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전 지금 소극장 무대를 얻었잖아요. 그런데 연극은 무대에 설 수가 없어요. 무대에 섰을 때 저는 다들 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연극은 그게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ㅡ정말 이상했어요.
거기 정말 추웠잖아요. 자리라곤 담요랑 방석이 다고. 너무 불편하고 너무 추웠는데 그게 극 내용이랑 너무 잘 어울리고.
ㅡ결국 그 고된 길을 가시려고요?
언젠가 Q에게 한 대답
ㅡ헤어질 수가 없는 거야. 그런 느낌이야 - 난 얘 정말 좋아하나? 진짜 모르겠다.
근데 내가 얘 없이 살 수 있나?
ㅡ반대로 연극은 이런 거지 - 너무 좋아, 계속 같이 놀고 싶어.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아직은.
W 교수님과는 짧게 이야기하고 일어섰다.
ㅡ아니 근데 사람이 이렇게 힙해졌어요? 반지도 여러 개에 바지에도 뭐가 주렁주렁이고 -
웃었다.
그리고 나의 그런 것들을 무장 이라고 명명해주시는 교수님의 말.
5는 다짐 ;
오늘은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동경하던 누군가를 보았다.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끌어내려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라지는 게 더 불행했다
불행하지 않으려고 욕망을 없애지 않고 무거운 눈으로 욕망하겠다고
-없는 것을 (정말 없는 것일까? 오히려 없는 것은 나한테만 있는 것일지도 몰라) 보고 욕망하는 일
-없는 욕망을 보는 일
기쁘고 무겁고 불행에 가깝게 귀하게 가능한 계속해서 전자를 선택하고 정말로 욕망으로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