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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씨 Aug 25. 2021

타인을 따뜻하게 불러줄 수 있는 여유






 몇 년 전, 잠시 마트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사는 수많은 상품의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했다.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계산원이란 직업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란 걸 알았다. 작은 가게라서 그런지 단골손님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손님들과 소통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저 기계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융통성을 발휘하고 유머감각도 필요한 직업이 바로 계산원이었다. 그런 부분이 잘 맞지 않았던 난 생각만큼 오래 일하진 못한 게 사실이다. 뭐 알바니까 평생 할 생각도 없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나의 인내력은 짧았다.    





       

 주 6일, 하루 5시간의 짧은 알바였지만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야 했다. 히키코모리 기질이 있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지병도 있는 내게 그 일은 꽤 벅찼다.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친구들은 나의 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5시간인데도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내가 봐도 많이 한심했다. 하지만 지병이 완치되지 않는 한, 계속 이런 문제와 마주쳐야 하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일을 하려는 의지에 만족해야 했다. 솔직히 사람 상대하는 일에는 젬병이다 보니 트러블도 가끔 있었고 난 그다지 좋은 직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장님이 워낙 성격 좋으신 분이라 나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많이 덮어주셨다. 그 점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드릴 일이다.     





          

 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었다. 어떨 때는 말 한마디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좋았던 기억만을 위주로 들춰보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자주 오시는 한 중년의 여성분은 딱 봐도 정말 인상이 좋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말씀이 참 따뜻했다. 처음 보는 알바생인 나에게 상냥한 말투로 질문을 하시곤 했다.

“공주야~ 이거 얼마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타인에게 쓰는 공주라는 말은 보통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많이 쓰는 표현인데 20대가 넘어서 들으니 참 신선했다. 알게 모르게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고 참 다정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공주야 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마음에 여유가 있고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내심 그 넉넉한 마음과 여유가 부럽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너무나도 마음에 여유가 하나 없고 불안하고 답답했으며, 히스테릭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때 당시에 내가 적당히 사는 방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역시 난 별로 일 잘 하는 알바생은 아니었다.      





    

 또 다른 손님으로는 어린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인사성이 밝고 말을 잘 하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어머니를 보고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극적이고 시원시원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 아이가 물건을 사고서는 갑자기 내 오른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무얼 하려는 걸까 싶었더니 그 작은 손으로 팔을 주물러주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   

“힘드시죠? 제가 마사지해드릴게요.”

갑작스러운 어린아이의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워왔는지 작은 손이라 시원하진 않아도 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팍팍한 세상살이라고만 생각하며 미간을 자주 찌푸리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잔뜩 긴장하면서 사는 게 기본이었던 내게 조금이나마 릴랙스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멋쟁이 할아버지시다. 그분은 70대 정도로 보였는데 항상 오실 때마다 먼저 이야기를 건네주셨다. 요구르트를 나눠주려고 하시기도 했고 물론 정중히 사양했지만 고마운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그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었는데, 자신의 생활 이야기나 자식 이야기 등의 신변잡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풀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한마디로 유머 넘치는 스토리텔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분이 오시면 깔깔 웃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음이 젊으셔서 그런지 절대로 당신을 할아버지라고 칭하지 않으시고 아저씨라고 하셨다. 이 부분도 웃음 포인트였다. 캐주얼하고 멋진 모자를 쓰고 자주 나타나신 멋쟁이 할아버지의 입담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이렇게 좋았던 기억에 더 집중하면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건 얼마 전부터다. 나는 그 일을 그만둔 뒤 안 좋았던 기억만 끄집어내며 합리화에 열중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좋은 일도 상당히 많았다는 걸 알았다. 단지 내가 너무 예민했고 아팠으며 오랫동안 괴로움에 시달리다 보니 내면이 지옥같이 변해버렸던 것뿐이다. 이제는 그런 면을 인정하게 되었으니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다 그저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겨우 좀 더 마음이 여유롭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어느 수도자가 사하라 사막까지 가서 수련을 했는데 그 후에 깨달았다는 게, 굳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사막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문제는 내 마음 속에 있었고 여러 직업을 돌고 돌아서 알게 됐다는 건 결국 각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다기보단, 심적으로 혼란해서 ‘일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게 아닌가 싶다. 직업을 자꾸만 잃어버리는 나로서는 이젠 그저 누군가에게 먼저 따뜻하게 ‘공주야’ 하고 불러줄 수 있는 여유가 갖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난 한 직업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오직 심신의 안정이니 그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하며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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