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강박성 성격장애 환자의 치료 이야기
두 달 만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방문했다.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딱히 상담받을 고민이 없었다. 요즘 몇 달간 나는 너무나도 즐거운 백수생활을 하고 있고, 증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약간의 예민함은 달고 살아도 이제 죽고 싶다는 생각도, 극단적으로 치우친 생각도 거의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일부러 우울함을 느끼게 할 노래를 찾아 들었는데도 또 자기혐오에 빠져들거나 신세를 비관하는 일은 없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믿지 않으시는 듯했다. 혹시나 내가 반어법으로 얘기하는 건 아닌지 물어보실 정도였다. 그리고 일단 더 지켜보자며 똑같은 약으로 처방을 내려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10대에서 20대의 삶 동안은 정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왔었다.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현실의 할 일을 겨우 쳐내면서 위기를 모면할 뿐의 인생이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목표도 없는 채로 육체가 죽기 전엔 간신히 목구멍에 거미줄만 안 쳐야지 하는 최소한의 목적만 두고 살았다. 이렇게 내가 가진 병들은 한 인간의 성장을 방해했다고 본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차근차근 해나갈 일도 나는 미루고 무시하고 망쳐버리는 식으로 살았다는 걸 이제는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성장이 그만큼 늦춰진 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진작했었어야 하는 고민을 늦게서야 하는 중이다. 이젠 살기로 결정했으니까 인생의 목표를 뚜렷하게 세워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누군가에게 막연히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더니 그건 아주 애매모호한 기준이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건 오히려 생각보다 높은 것이고 확실한 기준도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첫 번째로 생각해낸 건, 일단은 정말 딱 중간만 가자는 것이었다.
나 같은 강박성 성격장애 환자에게 있어서 완벽 추구는 무의식에 깔려있는데 이미 내부 압력만으로도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번 더 의식적으로 압력을 넣고 외부적인 스트레스나 압력까지 더해지면 멘탈은 다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간만 가자는 목표의식은 일생의 목표가 되지는 않더라도 당장의 할 일을 처리할 수 있게는 해준다. 그런 사고를 통한 일상의 유지만으로도 나에게는 크게 감사할 일이란 건 확실하다. 앞으로도 더 이상 무의미한 완벽주의를 추구하지 않게끔 생각의 유연성을 높여갈 요령을 찾아나갈 생각이다.
한편, 이 글을 쓰는 현재에는 한 가지 증상이 다시 생겨나기도 한 것 같다. 식욕저하로 입맛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병을 앓는 동안 계절이 여름으로 바뀔 때 자주 나타나긴 했지만 다시 찾아오니 또 괴롭긴 마찬가지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약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체중은 절로 줄어서 다이어트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그래서 더 많이 먹기 위해 오히려 운동을 하러 자주 밖에 나가고 있다.
어떤 증상이 오더라도 루틴은 지킬 것.
이렇게 내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킴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비관의 늪에도 빠지지 않게 하고 있다. 이제 살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나를 지켜내야 한다고, 더 망가지지 않게 잘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날 괴롭게 하는 예민한 몸이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것이니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이렇게 생각하니 입맛은 없지만 이제는 조금 살맛은 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