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
지난 8월 말 추석명절 이틀정도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어 예약을 하다가 포기하고 그 대상을 호텔로 바꿨다. 호텔은 많았고 예약은 가능했다. 다만 비용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나는 좋은 호텔을 원한 것이 아니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기를 갖기 원했기 때문에 가성비 높은 호텔을 알아보았다. 비즈니스호텔은 비용이 많이 저렴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도 적었다. 그렇게 나의 추석이 호캉스로 바뀌었다.
결혼 21년 동안 혼자서 명절을 보낸 적이 없었다. 시댁은 큰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고 명절이라고 차례를 지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전날부터 가서 음식도 하지 않는다. 같은 지역에 살아 명절당일날 아침에 가서 밥 한 끼 먹고 돌아온다. 그것도 남편이 전날 술을 먹느냐 안 먹느냐에 따라가는 시간이 바뀐다. 거의 술이 떡이 돼서 들어와 10시가 넘어 술냄새를 풍기며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집에 꿀을 발라놨는지 밥숟가락 놓기 바쁘게 집으로 왔다. 그러면 그것도 다 내 탓이 된다. 나는 아이들을 맡아줄 누군가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댁엘 간 것인데 밥만 먹고 돌아오면 난감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명절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전이나 튀김도 하고 잡채도 하고 갈비며 나물반찬도 하루 종일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아이들은 갓 만든 음식은 한 번은 맛있게 먹어도 며칠 동안 남아있는 기름진 음식이나 나물반찬은 싫어했다. 직장을 다니고 나서도 음식을 계속 만들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손을 뗐고 내가 소비할 수 있는 만큼씩만 만들었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호텔까지 예약을 하고 나니 그냥 나도 한 번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다만 아이들의 밥이 걱정이었지만 이미 다 커서 솔직히 돈만 쥐어주면 굶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나는 이리 쉽게 집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결혼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또 들어가고 들어가지만 진짜 가기 싫은 곳이 되어 있었다.
2021년 추석에 입원을 해 수술을 받았었다. 그때 사실대로 알린다면 시어머니는 놀래서 기절한다는 남편말에 코로나로 출근해서 못 간다고 전화를 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시댁에 웃으면서 죄송하다 사죄의 전화를 했었고 마취에서 깨어나 비몽 사몽 혼자서 통증을 견뎠었다. 지금생각하면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가스라이팅인데 그걸 몰랐다. 너무 순진하게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호텔에 오기 전 지하철을 타기 직전 남편에게 전화로 병원에 입원으로 시댁에 못 간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시댁에도 전화해서 이번 연휴는 못 간다 했다. 물론 두 아들들에겐 며칠 전부터 계속 밑밥을 흘렸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주입시켰다. 고양이 밥 주는 것과 화장실 치우는 것도 부탁해 두었다.
운동을 한덕분인지 혼자 며칠 동안 홀가분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설렘 때문인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계단을 올라도 힘들지 않았다. 나도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21년 동안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나 그 시간이 아깝다. 돈을 번 기간이 짧았고 아이들도 어렸고 힘든 시기를 지나 지금이라도 이럴 수 있으니 나는 너무나도 좋다. 비록 5성급 호텔은 아니더라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좋다. 하루종일 잠옷바람으로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동생이 선물해 준 나태주시인의 시집도 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또 대낮에 맥주도 시원하게 한잔 먹고.
공식적으로는 병원입원이고 비공식적으론 호캉스다. 요가매트를 넣기 위해 큰 캐리어에 짐을 쌌고 시집 두 권과 노트북, 공부할 책, 옷가지가 전부이다. 손바닥만 한 호텔방이지만 나에겐 파라다이스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오션뷰도 좋고 무료 조식도 좋다. 또 이런 날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을 위해 하루를 쓸 수 있다는 게 충분히 행복하다. 언젠가 시댁 말고 당당히 여행을 떠난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대한민국 며느리로 살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거짓말이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나는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빼고 다 가족인 사람들이라 시댁이든 친정이든 그냥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살 것이라고 다짐을 했기 때문에 욕을 들어도 참을 수 있다. 오늘 하루 나를 위해 오롯이 집중하고 집중할 테니.
혼자 먹고, 운동하고, 반신욕 하고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이런 시간이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굳이 이렇게 까지 한건 나도 살고 싶어서 도망을 나왔다. 숨을 쉬고 살고 싶었다. 저녁에 떠오르는 꽉 찬 달을 보고 아침에 붉게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잊고 살았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나를 너무 홀대했다 후회가 밀려온다.
나만의 호캉스도 끝이 나 간다. 혼자만의 이런 호사를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