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에 접어든 직장 생활하는 여자사람아줌마인 나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너무 계획형이라 가끔은 쉬는 것도 계획에 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서 멍 때리기! 커피 마시면서 TV 보기 같은 사소한 것도 계획 속에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획에 없는 행동들은 하지 않는다. 이 계획형 인간은 무언가 성과를 내는 것에는 좋지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일상은 멀어지게 할 때가 많다. 돈도 마찬가지다. 월급이 들어오는 10일을 시작으로 다음 달 9일까지의 지출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쓴다. 가끔 돌발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지출도 포함해서 지출할 금액을 파악한다.
오늘은 11월 1일이다. 어제까지 미루고 미루던 카드 결제를 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깨어있으면 밤 12시가 넘은 새벽에 결재를 시작한다. 가끔 장바구니에 담더라도 고민이 되는 것들은 지우는데 새벽 감성에 취해 결재를 하면 아침에 꼭 결재취소를 하고 만다. 새벽 결재가 이렇게 무섭고 잔인하다. 살까 말까 하는 것은 안 사는 편이지만 새벽에 장바구니를 보고 미소 지으며 결제를 하려고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소름이 돋는다. 새벽감성은 계획형 인간을 말캉하게 만들기도 하는 마법이 있는 것 같다. 통장에 잔고를 많이 두는 편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있다 보니 기본적인 잔고가 있다. 모자란다 싶으면 가지고 있던 현금을 통장으로 채우기도 하고 통장잔고가 많다 싶으면 현금으로 인출해 보관하기도 한다. 보험료와 휴대폰요금, 식비, 교통비 같은 고정지출과 경조사나 병원비 같은 돌발성 지출을 위한 약간의 여유자금을 비축한다. 그런데 지난 10월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나름 선방한 것 같아 다행스럽다. 용돈을 받아쓰는 아들들보다 나는 돈을 덜 쓴다. 사실 용돈이라는 게 거의 없다. 집과 회사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맴돌 뿐 일정에 없으면 그 루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돈을 모을 수 있는 것 같다. 월급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쥐꼬리만 한 그 월급을 쓸 시간이 없다. 시간은 내면 있는 것이지만 또 그 시간이란 게 쉽게 내어지지 않는다.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집안일이라는 2차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출근을 하고 조직의 일원으로 일을 하는 성취감이 매우 큰사람이라 급여는 늘 두 번째 우선순위다.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나이 50 되어가는 여자사람아줌마에게 돈 많이 주고 일 적게 시키는 조직은 단언컨대 없다. 내가 지치고 힘들어 보이면 여동생은 '돈 벌어야지' 하며 나를 깨운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럴 때는 결제해야 할 카드값과 지출해야 할 돈의 액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내려앉았던 어깨가 솟아나고 풀렸던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침침했던 눈도 커지며 생기가 돈다.
' 역시 월급만 한 땔감은 없다. '
' 역시 카드값만 한 기름은 없다. '
절실함이 이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버틸만하다. 비록 비상금으로 굴리는 펀드며 주식은 다 마이너스의 강을 건넌 지 오래고 매도 타이밍을 보고 있지만 왜 내가 팔면 오르고 내가 사면 내리는지 누가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적금이나 성실하게 붓고 예금에 묻어 뒀으면 중간을 갔을 텐데 말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가끔은 양가감정을 들게 할 때도 있다. 49:51로 좋기도 싫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에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물어보는 느낌이다. 10월을 무사히 지나 11월로 접어든 오늘 비록 내 통장 잔고는 79,801원이지만 앞으로 이 숫자 앞에 어떤 숫자가 더 붙을지, 이 숫자뒤에 0이 몇 개가 더 붙을지는 모른다. 지금은 그저 무언가 통장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를 즐기려 한다.
고생했다. 10 월아! 고생해라 11 월아.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장한 10월과 앞으로 한 달간 나와 보낼 11월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