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생일
아침부터 은영의 작은 어깨가 춤을 추는 듯 들썩였다. 내일은 은영의 생일이었다. 동짓달에는 동생과 은영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얼마 전 동생의 생일에는 할머니께서 팥시루떡을 해서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했었다. 할머니께서 은영의 생일에는 백설기를 해 준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할머니는 오늘 쌀을 씻어 불리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물으니 떡을 만들라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께서 떡을 해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은 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에 은영이 엄마를 보며 말했다.
"엄마 내일 내 생일에는 아무것도 넣지 말고 그냥 미역국 끓여줘. 나는 멸치도 비린내 나서 싫다."
"내일이 은영이 니 생일이가?"
자신의 생일을 잊은 듯한 엄마가 서운했지만 내일 들기름이 잔뜩 들어간 미역국을 먹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 심부름을 하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부푼 기대감으로 은영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은영이 마른 세수를 하고 바쁘게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가 아침 준비로 분주했다. 부엌의 냄비 뚜껑을 하나씩 열어보던 은영이 미역국 냄비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안방으로 들어와 밥상을 차리는데 국이 없었다. 부엌문으로 반찬이 다 들어오고 국을 담은 쟁반을 들고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밥상으로 김칫국이 하나, 둘씩 올라왔다. 은영이 기다리던 미역국이 아니었다. 은영은 엄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인데 김칫국이가? 미역국은?"
"생일? 아이구야. 그라고 보니 오늘 은영이 생일이네. 엄마가 깜빡했다. 저녁에 미역국 끓이 주께 얼릉 밥 묵으라"
은영은 섭섭함을 말하지도 못하고 김칫국에 들어 있는 멸치를 숟가락을 세워 찌르고 있었다. 은영의 마음도 멸치처럼 퉁퉁불어 찢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맨밥을 몇 숟가락 퍼먹은 운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러움에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저녁에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긴 하루를 보냈다. 은영의 예상대로 해가 지도록 할머니는 백설기를 만들 쌀을 씻지도 않았고 엄마는 일하러 나가서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미역이라도 물에 담그려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미역은 없었다. 깜깜해지고 나서야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저녁상이 차려졌다. 밥상에는 아침에 먹던 반찬과 멀건 된장찌개가 전부였다. 은영이 종일 기다리던 미역국은 없었다. 얼마 전 동생의 생일상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상차림에 설움이 폭발했다. 밥상을 박차고 일어나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던졌다. 저녁을 먹던 식구들이 깜짝 놀라 은영을 바라봤다.
"쟈 생일에는 조기랑 김도 구워주고 할매가 시루떡도 해서 친구들까지 불러 잔치를 했으면서 와 내 생일에는 미역국도 안 끓이 주는데. 와 그라는데 내가 주워온 자식이가?"
은영이 울먹이며 참았던 눈물을 쏟고 있었다. 당황한 엄마가 은영의 등짝을 때리며 방바닥으로 끓어 앉혔다.
"가시나가 생일은 무슨 생일. 주는 대로 먹으면 되제! 나이가 몇 살인데 반찬 투정하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엄마는 은영의 등짝을 계속 때릴 뿐이었다.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은영이 방문을 열고 나와 수돗가에 앉았다. 눈물 자국 사이로 한겨울 찬바람이 은영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생일날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고 미역국 한 그릇 먹지 못하는 자신이 불쌍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는 은영은 찬물로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겨울 달빛이 조용히 은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며칠 뒤 장날 은영엄마가 은영이 키만한 미역을 사와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엄마가 밥상 앞에서 미역국과 반찬들을 앞으로 당겨 주며 은영을 챙겼다. 오빠도 남동생도 아닌 엄마가 자신을 챙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은영은 속으로 무슨 일을 얼마나 시키려고 이러나 싶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시큰둥하게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영에게 엄마가 말했다.
"은영이 니 생일 미역국 끓여 준기다"
"생일날 안 끓여준 거니까 이거는 생일 미역국 아이다"
은영이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은영이 마루에 조용히 앉았다. 은영의 뒷모습은 몹시 화가 나 들썩이고 있었다. 신발을 신는 은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한껏 화가 난 은영의 등이 빠르게 대문을 벗어났다. 골목을 지나던 겨울바람이 은영의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은영의 작은 어깨가 춤을 추었다. 골목에 있던 친구들이 은영을 반갑게 불렀다. 은영이 친구들을 향해 뛰어가며 외쳤다.
"나 생일 미역국 묵었다!." 은영이 겨울 햇볕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열아홉에 시집와 매운 시집살이와 농사일의 고단함을 견디며 딸의 늦은 생일 미역국을 끓였을 엄마를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코끝이 찡하다.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 주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다. 곧 동짓달 동생과 나의 생일이 다가온다. 이번 생일에는 미역국을 핑계로 어린 은영이 되어 그날의 젊은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