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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Feb 16. 2024

1년 뒤에 뵙겠습니다.

84,600원어치 행복

 며칠 전 병원 진료 문자가 도착했다. 벌써 6개월이 지나 정기 검진일이 다가온 것이다. 지금 오늘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날이지만 병원이라는 곳은 정말 친해지기 힘들다. 예약을 하고 진료날을 받고 보니 또 걱정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6개월 주기로 진료를 받고 있지만 무언가 이상이 생기면 그 주기는 더 짧아질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의 치밀 유방이라고 한다. 나는 이 치밀 유방이 근육이 많아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유선조직의 양이 많아 조직이 치밀해서 유방촬영 시 하얗게 보여 유방내부의 혹이나 미세석회화를 가늠하게 어렵다고 한다. 병의 발견이 어렵고 그만큼 진단을 내기기 힘든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랐을 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알고 나니 겁이 나고 걱정이 되었다. 모양이 울퉁불퉁하고 크기가 큰 것이 한 개 있어서 조직검사까지 했지만 다행히 악성은 아니라 지켜보자고 했다. 사이즈가 애매하게 커서 수술을 하기보다는 커지지 않는지 지켜보고 크기가 자란다면 수술을 하자고 하셨다. 갱년기가 다가오면 커지기도 하고 수술을 하더라도 또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완전한 폐경이 되고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면 없어지기도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헛웃음이 났었다. 

출근을 해서 급한일을 처리해 놓고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상의를 탈이하고 가운을 갈아입고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여며도 벌거벗은 것 같고 가운사이로 바람이 들어오 늘 것 같아 팔짱을 끼고 대기실에 앉았다. 슬리퍼를 신고 옷장열쇠를 팔에 끼고 앉아 있는 그 짧은 10여분의 시간이 어찌 그리 긴지 무교인 나에게 하느님, 부처님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수술은 정말 하기 싫었고 체력도 많이 떨어진 지금이라면 회복도 더딜 것이 분명했다. 괜찮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적처럼 되뇌고 되뇌었다. 내 이름이 불려졌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짧은 문진을 하고 초음파실로 이동했다. 



가운을 벗고 상반신을 노출한 채 만세를 하고 누워있으니 살짝 자괴감도 들었지만 진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산부인과나 유방외과는 수없이 진료를 받아도 어색하고 낯설다. 초음파상으로는 다행히 조직검사까지 했던 곳도 크기가 조금 줄었고 물혹은 많기는 하지만 더 생기지는 않았다고 했다. 6개월마다 받던 검진을 1년 뒤에 받으라고 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초음파 비용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비급여가 아닌 급여로 처리되어 대략 8만 원이 조금 넘지만 실비보험이 있어 청구가 가능하다. 휴대폰 앱으로 청구하니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대략 3시간 후 입금까지 완료되었다.



 다이어트를 해서 10kg 이상 감량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슴도 작아졌다. 본래 가진 것이 없었지만 없던 것이 더 없어지니 몸은 통나무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6개월 동안 별 탈없이 제자리 걸음해준 나의 석회질(?)에게 고맙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애매하지만 더 자라지 않아 내년 이맘때 가서 다시 도장을 받아 오면 된다. 몸은 하나인데 아픈 곳은 왜 이렇게 많은지 작년 12월에 시작된 감기가 아직 붙어 콧물이 계속 난다. 임시로 코를 막고 생활했는데 내일은 이비인후과에 가 보려 한다. 삶의 질이 바닥이다. 



병원은 친하게 지내되 가급적 자주 만나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도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야 한다. 미루고 미루다 큰 병이 되고 만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왠지 콧노래가 난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 1년 뒤에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줄 몰랐다. 행복이 참 별거 없는 생각이 든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장땡인 것 같다. 인생 복잡한 것 같아도 정말 단순하다는 걸 오늘 다시 한번 느낀다. 과거의 나는 먹지 않고 잠은 안 자도 자아실현의 욕구가 전부였다. 목표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등 따시고 배부른 이 1차원적 욕구만 충족되어도 너무나도 행복하다. 늙어서 그런 것인지 더 이상치고 올라가 봐야 별거 없다는 걸 깨달아서 인지도 모른다. 

 불타는 금요일 퇴근 후 나는 먹고 자고 늘어지게 쉴 생각을 한다. 고양이 뱃가죽을 조물딱 거리며 햇살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누워 골골송을 듣으며 낮잠을 자는 주말을 생각한다. 그렇지 이게 행복이다. 정말 파랑새는 내 주머니 속에 있는 것 같다. 퇴근 후 내 주머니 속의 파랑새를 살포시 꺼낼 생각에 웃음이 난다.  


1년 뒤에도 1년 뒤에 만나자고 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고 잘 지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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