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총량의 법칙

by 숨비소리

어제 딸아이의 풀배터리 검사 결과를 들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크지만 낯선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정도가 100점 만점에 100점을 채웠다.

하고 싶은 건 산더미인데 겁이 나서 하지 못하니 그동안 내적갈등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못나 보였을까.

게다가 인내심은 100점 만점에 0점.

관심은 많지만 겁은 더 많고 꾸준히 해낼 인내심도 타고나질 못했다.

기질이라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것.

결과지를 보는 순간, 열려있던 출구들이 모조리 닫혀버리는 것 같았다.


퇴근한 남편에게 결과지를 보여주며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사회생활 못 하겠네."


남편은 쉽사리 아이의 인생을 결론짓는다.


"방법을 찾아야지."


그렇게 말은 했지만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상담사는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며 한 번 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우울증과 사춘기.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이 만나버렸다.


"사춘기는 대체 언제 끝날까요?"

"보통은 중2 정도? 중3이 되면 대부분 사춘기로 인한 극심한 변화는 누그러들더라고요."


내년에도 휴직을 해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상담센터를 나서며 이번 주 금요일에 있는 딸아이의 상담을 취소하고 대신에 내가 상담을 하기로 했다.

아이를 어떻게 지도하고 어떤 방법으로 타고난 기질을 보완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상태를 진정시킬 필요도 있고.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나를 멈춰 세워야 한다.


자극추구 97, 불안 100, 인내심 0.

극단을 달리는 아이의 기질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

우울증이 심한 상태니 불안과 인내 부분은 실제 기질보다 더 과장된 게 아닐까.

내 상담이지만 분명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오게 되겠지.

나는 상담사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수요일에 너무 막막했어요. 모든 출구가 막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타고난 기질은 바꿀 수가 없는데 이걸 대체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기울인 모든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수요일에 결과를 들을 때 사실 너무 울고 싶었는데 참았거든요.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아이한테 네가 나아지려면 네 노력이 제일 중요해, 그러니 힘들어도 노력해 보자고 했더니 그냥 안 나을래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속상하고 허무하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대체 왜 내가 휴직을 하고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네가 정말 낫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구심도 생겨. 학교 안 가도 뭐라 안 하지, 집에서 편하게 지내지, 그러니까 굳이 나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라고 아이한테 말해버렸어요. 집에 와서 남편한테 설명해 봤자 사회생활 못 하겠네라는 한 마디가 끝이고... 딸아이는 친구들과 전화하면서 웃고 있고 남편은 게임삼매경에 빠져 있고 아들도 자기 방에서 쉬고 있는데 나만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이 상황이 억울하면서도 허탈하다고 해야 하나... 나만 왜 이러고 있나 싶어서 정말 술 생각이 났어요. 근처 사는 친구한테 연락할까 했는데... 그냥 참았어요. 슬플 때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슬플 때마다 찾게 될까 봐서요."


그리고 묻고 싶은 것들도 정리해 본다.

아이의 우울증이 JTCI나 MMPI 검사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지, 인내심이 부족한 기질에 우울증까지 겹쳐져 의욕이라곤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이끌어야 할지, 주체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지, 지금 학교를 쉬고 있는 이 상황이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성취압력을 줄 수 있는지도 묻고 싶다.

자식에 대한 성취압력이 0이라고 하는데 나는 애초에 무언가를 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성취압력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대충 정리되자 나에 대한 평가가 눈에 들어온다.

만성적 우울증과 불안, 회피하는 성향, 낮은 자기 확신, 대인관계에서의 긴장감, 사회적인 상황에서의 위축...

무엇 하나 멀쩡한 게 없다.

우울과 내향적인 성향은 딸아이보다 오히려 내가 더 높다.


'이 지경인데도 용케 지금까지 버텼네...'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지를 받아보니 그게 아니다.

실망감과 허무함, 허탈함이 등장한다.

하지만 마음이 온통 멍들고 부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나에 대한 자부심, 안쓰러움, 대견함도 함께 따라 나온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도저히 움직이지를 못한다.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빨래가 넘쳐흐르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아침이 되었다.

비누공방에 12시 반까지 가기로 예약한 날이다.

어제 자기 전에 보조치료제를 먹어서 그런지 오늘은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다고 했다.


비누공방의 주인은 의외로 남자였는데 다소 수다스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딸 앞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낯선 것에 대한 불안이 만점을 찍은 아이.

지금은 스스로 하는 것보다 남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자기 생각처럼 무서운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선일 지도 모른다.

아이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비누를 만드는 활동에는 흥미를 보였다.

공방 사장님께서 고체 비누를 좀 더 녹여주셔서, 원래 만들기로 예정된 비누 외에도 다양한 사이즈의 물고기, 공룡, 하리보 모양의 비누도 잔뜩 만들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쭈뼛거리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 스스로 몰드를 고른다.

공룡모양 비누가 다 굳기 전에 빨간 비누조각을 공룡 속에 집어넣어 심장도 만들어 준다.

그걸 본 공방 사장님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본다.

공룡 비누에 심장을 넣은 건 딸아이가 최초라고 했다.

긴장하지 않았을 땐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발상도 잘하는 아이인데.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체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비누 만들고 나서 좋아졌어."

"재미있었어?"

"응."

"너는 보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게 더 좋아?"

"응."


다음번에는 화장품을 만들러 오자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한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체험활동이 있다면 어디든 가야겠다.

낯선 곳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 타고난 기질도 조금은 바뀌겠지.


하루가 지난 지금,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막막한 상황이지만 내일 상담을 다녀오고 나면 어느 정도는 답답함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긴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게 될 텐데 거기서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고 새로 간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이 잘 맞아서 금방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막막하고, 앞도 보이지 않고,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사는 걸 멈출 수는 없다.

포기하거나 도망칠 수도 없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


'우울증+타고난 기질+학교에서의 부정적 경험+사춘기'가 합쳐져 대환장 파티를 벌이는 중이니 당연히 검사에서 좋은 결론이 나올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사춘기가 잠잠해지고 우울증도 가라앉고 나면 아이도 조금씩 바뀌겠지.

지금 이 검사 결과가 내 아이에 대한 결론인 건 아니다.

그건 그저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오늘은 싱크대 주변이 깨끗하다.

산처럼 쌓여있던 빨래도 사라졌다.

내게 기운이 생겼다는 증거다.


'애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죽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무슨 상관이람. 그냥 죽어서 이런 괴로움 같은 건 안 느끼고 싶어.'


라던 어제의 생각은


'그래도 방법이 있겠지. 사춘기만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지랄도 총량이 있다잖아.'


로 바뀌었다.


지랄 총량이 법칙.

그래.

지금 이렇게 애먹이고 있으니 나중에 커서는 안 그러겠지.

어렸을 때 이만큼 흔들리고 비틀대고 넘어지고 괴로워했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큰 나무로 자라나겠지.


그런 희망을 마음에 간직한 채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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