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직 이야기1.

황당했지만 감동이었고 위로가 되었지만 응원은 되지 못한

by 늘날생각해


"자기도 몰랐지? 못 들었지? 0월 0일까지만 하고 그만 두는 거?"

"... ..."


나는 정말 몰랐다.

그래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두 번.

직장에서 누군가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던 게 언제였던가. 아마도 처음이었을 테지.


그랬다.

나는 정말 몰랐고 다른 사람도 몰랐고

소위 말하는 윗대가리만 알고 있던 사실을 x선배가 먼저 알아버렸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x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을 것으로 추측한 공간으로 찾아와

냅다 소리를 지르며 모두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어쩌다 보니 그 공간에서

'0월 0일까지만 일하고 그만 두는' 대상에 포함 된 건 나 하나뿐.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도도한 눈빛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던 그들이었지만

"아. 이.게.어떻.게.된.일이.람? 내려가서.알.아봐.야겠다.

수고하세요오"

어색한 혼잣말을 크게 웅얼거리며

나에게 다정한 인사까지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구나.

그렇게 되었구나.

근데 0월 0일은 화요일인데?

보통 사람 정리는 월요일부터 적용되지 않나?

선배가 날짜를 잘못 알았나?


하염없이 달력을 바라보다가

나중에 쓰려고 묵혀뒀던 좋은 아이템, 이제 쓸 때가 되었구나.

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생각 반.


뭐 해먹고 살지.

하고 싶은 건 많으니 이것 저것 하면 하루 금방 가긴 할 텐데 돈이 아쉽네.

드디어 보험을 일시중지 시키는 날이 오나.

하며 앞날을 걱정하는 생각 반.


두 개의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워

꿈 속에 있는 듯 몽롱한 채로 책상 앞을 지켰다.



잠시 후. 몇 번 같이 일한 적 있는

다정한 a선배가 왔다.

시크한 b후배와 얘기를 나눈다.

수군거리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들만의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모양새다.

가만히 있어야지.


활기차지만 일할 때 졸고 있는 걸 목격한 적 있는

c선배도 왔다.

늘 그렇듯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인사하고는

전에 본 적 없는 정숙한 표정으로 a와 b의 대화에 낀다.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조용히 있어야지.


셋 중 가장 대장 격인 a선배가 나에게 온다.

밖에서 1분만 얘기하자고 한다.

네.

얼떨떨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그녀를 마주 하고 앉는다.


아까 x의 만행을 전해 들었다며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혼자 폭로해버린 것에 대해

대신 사과를 한다고 말했다.

x가 초등학생 같은 짓을 했다며

x랑 일해본 적 있냐고 물었다.

"아뇨. 근데 얘기 들은 게 있어서 어떤 분인지 대충 알아요. 하하."

멋쩍게 웃었다.

멋쩍게 웃는 것밖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x은 대체 왜 그런답니까? 대체. 후배 교육 좀 제대로 시키세요!"

할 수도 없고,

"근데 진짜 사실이에요? 그렇게 결정이 난 거예요?"

확인사살을 스스로 자처할 수도 없고,

"x 얘기 듣고 동공이 흔들리고 등판에서 한꺼번에 수분이 분출돼서 정말 난감하더군요. 하하."

너스레를 떨 수도 없었다.


그래도 고마웠다.

당황했을 혹은 서운했을 나를 위해

차근차근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고

내일 확실하게 결정날 것이라고도 말해주는 a선배가

참선배라고 느꼈다.

특히, x의 행동을 '만행'이라고 불어주어 더 고마웠다.



키가큰 i가 찾아왔다.

카톡으로 b한테 얘기 들었다고.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 b.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보며 일하는 것 같더니

카톡으로 동네방네 소식을 전하고 있었나 보다.


"제가 그랬죠? 원래 저런 사람이라고. 암튼 진짜.... 어휴....

아, 맞다. 어제 드라마 봤어요? 작가 바뀌었나? 내용이 영 엉망이던데요?"

i는 솔직담백한 호응으로 나를 위로해주었고

쿨하게 즐겨보는 드라마 얘기로 주제를 넘겼다.

나는 또 얼떨떨해졌지만 금세 적응하고

"아, 진짜? 재미없어졌어? 에이. 안 봐야겠다."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이런 맞장구를 앞으로 몇 번이나 쳐야만 마무리가 될까.

결전의 그날이 올 때까지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나저나 그 드라마 진짜 별로예요?

라는 식의 AI 같은 얘기를 반복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내일은 또 어떻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야 할까.




그날의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쓴다.

어쩌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그날.

마치 온 우주가 나를 향해

쉬어라, 멈춰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

원치 않은 응원을 해주고 있는 듯한 날들 속

가장 원치 않은 응원을 받은 그날.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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