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없는 거 아닌가
최근 책 읽는 일이 참 좋아졌다.
아마도 행위 자체를 좋아했지, 이야기를 즐기지는 못했다면 지금은 그 이야기의 재미를 알게된 것이 새롭다.
마음을 먹고 처음 접했던 책이 아프리카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에세이였다.
탄자니아로 촬영을 다녀왔던 기억과 오버랩 되면서 꽤 즐거웠다.
그렇게 여행 이야기를 다루는 에세이류의 책을 즐겼다.
책 속에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가보지도 않은 나라와 도시를 글자로 여행했고 어떤 날에는 책장에 그려진 날씨가 실제로 느껴지는 것 같은 날이 있을만큼 푹 빠졌다.
그러다 그마저도 실증이 났는지, 더이상 새롭지 않았는지 그만두었다.
또 그렇게 담을 쌓다가 어느 날 책을 선물할 일이 생겼다. 서점에 갔지만 베스트셀러 칸에서는 고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더 특별한 선물이 되려면 선물할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책을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몇 권의 책은 그날 만난 친구들에게 꽤 좋은 평을 받았다.
그게 [지구 끝의 온실], [멋진 신세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었다.
아마도 조금씩 나이를 먹게 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나는 원래 이런거 안좋아해', '이런건 나랑 맞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였다. 그냥 나는 '허구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독할만큼 에세이말고는 다른 류의 책을 거들떠도 본 적이 없다.
굳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상상해보는게 귀찮았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허구의 이야기를 재미라고 느끼기에는 영화도 드라마도 이미 넘쳐났기에 글자로 표현된 이야기를 다시 상상하는 에너지를 쓰는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별게 아니다'
우리는 별의 별 일 속에 살아간다.
아침 출근 길 지하철 인파 속에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미간을 찌푸리고,
간 밤에 꾼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 어떤 예지몽은 아닌지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한다.
왜 저 사람은 오늘 나에게 이렇게나 짜증을 내는건지, 저 후배는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철 없이 굴 것인지에 대해 화도 나고 지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난 언제까지 이렇게 화가 나고 지치는 일상을 매일 살아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할만큼 지치기도 했다.
그러다 별 일이라던 그 모든 것들이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나뿐일까.
정말 유난히도 감정적 스트레스로 에너지 과다 소비 상태를 겪고 있던 나로서는 그만한 해소가 없었다.
인생 대부분의 일이 사실은 지나고 보면 별 일이 아니라는 말이 많지만 그걸 깨닫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일종의 착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마도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었다는 나만의 착각이다.
하지만 착각 또는 망상이 현실 도피에 도움이 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자.
"손님들 전부 '데자뷔'가 엄청 신기하다고 후기를 남기셨어요."
"Deja-vu! '이미 보았다'는 뜻이지.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잇는 것 같은 현상을 이르는 말이란다. 재밌지 않니? 손님들은 우리가 파는 자투리 예지몽에 예쁜 이름까지 붙여주었어. 정말 독창적이야!"
달러구트가 감탄했다.
"페니, 그거 아니?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자뷔를 신기해하긴 하지만, 뇌의 착각 정도로만 생각하고 무시해버린단다."
웨더 아주머니가 말했다.
"정말요? 에이, 너무 시시해요. 기껏 예지몽을 팔았는데 겨우 이 정도 반응이라니..."
페니가 김샌다는 듯 목덜미를 긁자 달러구트가 껄껄 웃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지! 미래를 봤는데도 아무도 혼란스러워지지 않았잖니?"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뭘 본 게 없으니까요."
페니는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다.
"그거면 된 거란다."
달러구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마르군. 시원한 에이드나 한잔 만들어야겠어. 자, 오늘은 특별히 방금 들어온 '호기심'을 몇 방울 넣어볼까?"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