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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지 Jan 03. 2023

착함에 대한 정의

진정한 의미로써의 <선함>이란?

'착하다'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다. 나이가 들고 위계질서가 중요해지는 현대사회에서의 '착함'은 어떤 부분에서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처럼 자신의 주장을 펴지 못해 골머리를 썩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거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할 말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만 일부 사회지도층 외의 모든 서민을 복종하게 하는 사회 시스템 상 적당히 낮추고 맞추는 게 규칙 저럼 자리 잡았다. '착함'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착함이라는 것이 만들어서 존재하는 것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순수한 의도로서의 접근을 ‘무‘의 상태라고 하자. 예를 들어 집단 안에 소속되고 싶은 A가 B와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잘 대해준다고 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착함'이라는 반사이익을 얻고자 하는 형태로 접근한 것이고 잘 보인 후 집단의 소속되고 싶어 하는 본인의 의도가 묻은 행동이기 때문에 이 행동은 '착하다'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착함'이라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예외의 상황은 있다. 세상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지 않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이점이 다른 사람에게 반사이익을 전달할 때가 있는데, 어떠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본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B에 대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한 A의 행동이 B에게 이점을 줄 때 'B는 A가 착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적인 '착함'은 없으며 이점의 기준이 비슷한 다수가 모이면 착함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대가 만들어질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함’이라는 진정한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착함이라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착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A가 넘어진 친구를 보고 ‘헐 어떡해 괜찮니’라는 반응을 했을 때, 그 반응은 보상을 바란 것도 눈치를 본 것도 아닌 즉각적인 반응일 것이다. 사람(인간이라는 고통을 느끼는 공통점이 있는 동류)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 아픔을 본인에게 대입해서 반응한 것이니 이기심에서 비롯된 공감과 반응일 것이고 만약 친구가 위로를 좋아하는 성향이라 A의 ‘헐 괜찮니’가 친구의 관점에서 만족스럽고 정서적 이점을 제공했다고 느꼈다면 A가 착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류감을 느끼는 기준이 낮은 사람이 착할 확률이 높다. 그저 같은 인간종이라는, 혹은 고달픈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동류감을 쉽게 느끼고 이기심에서 나온 이타심을 반사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람. 물론 그 이타심에서 비롯된 친절행위가 상대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고 마음에 안 들면 ‘착한 행위’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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