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병들고 악하고,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표도르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지하로부터의 수기>
내가 이 책을 일게 된 계기는 내가 감히 한국문학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이승우 작가님의 <생의 이면>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실과 <생의 이면>에서의 골방의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실은 어두운 고독의 장소로만 묘사되지만 이승우는 골방을 주인공 부길이 자신의 어둠을 뛰어넘어 희망을 잉태하는 곳으로 진화를 시켰다는 차이는 있다.
이 책 1부의 주인공의 수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미치광이'인가 아니면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인가" 사이에서 많은 혼돈을 느꼈다. 분명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굉장히 그럴싸한 논리로 나를 유혹한다. 이 책의 화자는 '고통도 행복의 하나'라 하며 어찌 보면 '철인'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지하 생활자는 나와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이 당연히 옳다고 하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유익, 2X2=4라는 공식>을 당당하게 비판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을 보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욕구, 가장 거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변덕, 때때로 광기에 달하는 몽상까지도 모든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이익 중의 이익이라고 역설하며,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고, 삶에 있어서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마치 성직자와 같은 결연함까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지하 생활자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2부를 읽어보면 이런 생각은 싹 사라진다.
'아~씨! 아까 그가 말했던 환상적인 말들은 뭐였지?'라는 생각과 함께 허무감까지 든다.
실제로 이 지하 생활자는 책을 통해 인생을 배웠고, 책 속에 읽었던 말 만으로만 소통이 가능했던, 자신의 진심조차 거짓으로 말하게 되는 불쌍하고 답답한 찌질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이 40살이 되도록 지하실에 처박혀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몽상가 또라이'가 저런 철학적 말을 하니 앞의 말들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도스또예프스키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작가임은 틀림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지하 생활자와 동류가 아닐까?" 생각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말도 그냥 책에서 읽은 문장들을 나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나는 과연 나의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일까? 인위적으로 덧씌워진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정말 많은 생각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주의]
맨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1부에서 "이거 만만치 않은데?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겨?"라는 생각이 들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2부로 들어가면 매우 흥미진진해집니다. 그리고 2부를 읽은 후 1부를 다시 읽어보시면 "아 이게 그 소리였구만"이라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두고두고 볼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2부를 먼저 보고 1부로 넘어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