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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Mar 29. 2017

<로봇, 소리>, 이호재 감독

I Need To Find .

*2016년 1월 30일에 쓴 글입니다.


'I Need To Find Her.'

찾아야 한다는 명령. 아니 약속.

해관(이성민)과 소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이유이자, 교감하는 힘이다.  

   

 ‘로드 무비’라기에는 너무 정처 없이 떠돈다. 거리의 풍경은 그저 스칠 뿐, 어느 장소에서나 해관과 소리에 주목한다. 여행을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관은 10년 전 잃어버린 소중한 딸(채수빈)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암흑이 내린 바닷가에서, 사라지고 없는 딸을 떠올리던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누군가를 찾아야만’하는 공통의 숙명을 안고 추락한 로봇, ‘소리’다. (해관이 슬픔에 잠겼던 바다는 서해다. 해관의 얼굴에 수많은 이들의 슬픔이 오버랩 되었다.)

 그래서, ‘버디 무비’다. 해관과 소리뿐만이 아니다. 둘을 지켜보는 관객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된다.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해관은 거칠 것이 없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쉽게 믿기 힘든 존재와의 대면에서도 해관은 적극적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인신매매범으로 추정되는 이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국정원 요원들의 추적도 따돌린다. 해관은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도, <킹스맨>의 해리 하트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가장이다. 그에게 몰아닥치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처절한 부성애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냐는 아내의 절규에 (절규다. 딸에 이어 남편마저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터져 나오는 여느 어머니이자, 아내의.) “살고 있잖아! 이게 사는 거야?”라며 통한 어린 외침을 내뱉는 해관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의 표상이다. 마침내 유주가 대구 지하철 참사로 희생됐음을 알고, 어두컴컴한 선로에 엎디어 오열하는 해관을 보며, 그를 따라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것은, 이제 더는 그 무엇으로도 죽어버린 아이를 되찾을 수 없다는 허무함과 무력감 때문이었다.     


“유주야, 집에 가자. 여기 너무 깝깝해.”
- 지하철 선로에서 오열하며 해관이 하는 말


 지금껏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목숨들이 있다. 심장이 조각나고 남은 목숨이 닳아지는 마음으로 그 목숨들을 기다리는 이들이, 얼마나 수도 없이 저 말을 되뇌고 있을지 헤아려 보려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의미 있는 무엇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버렸다. 후에, 모든 안타까운 목숨들이 마침내 돌아오고 나면 우리 모두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늦게 와서 미안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늦게 와서 미안해..”


 영화의 마지막에, 해관이 소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정원 요원들로부터 소리를 가로채내고, 국정원 요원들이 총을 들고 그를 좇는다는 서사적 설정은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해 본다. “인간은, 자기가 한 약속의 70%를 지키지 않는다.”라고 소리는 말했다. 부끄러움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면 영화는, 우리는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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