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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Mar 31. 2017

<히말라야>, 이석훈 감독

그러나 사람.

* 2016년 1월 2일에 쓴 글입니다. 겨울이 끝나가나요.


그러나 사람.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은 동료의 시신을 구하러 가는 휴먼 드라마가 산보다 더 중요했다.
자연 풍광보다 사람을 보여주려고 했다.

- 따옴표 출처: 씨네21 1034호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스릴 넘치는 영화적 요소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런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개가 기존의 영화들을 답습하는 점이 많다. 유머는 애매하고 감동은 상투적이다.’라는 평가가 나오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볼거리가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어떤가. 사람 사는 이야기는 원래 다 비슷하고 애매할 때가 많은 것을. 

 사람의 어떤 일에 있어서나, 과정이 결과에 비해 잘 드러나기란 쉽지가 않다. ‘히말라야’가 일종의 종점이라면, 영화는 종점에 이르기까지의 다사다난한 과정들을 친절하게 풀어낸다. 과정이라는 것이 본디 함께 겪어낸 이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라 외부의 사람들은 그저 상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함께 겪어낸 이들에게조차도 개인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해와 감정으로 기억되는 것이 ‘과정’이라는 것의 실체이자 속성이다. 영화 <히말라야>는 이 복잡다단한 과정의 장면들을 최대한 빠뜨리지 않고 그려내기 위해 애쓴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생생하면서도 친근한 정서의 대사들이 이에 기여한다.

 영화 전반부의 이야기들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데스 존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후배 박무택(정우)을 데려오겠다고 나서는 엄홍길(황정민)의 행동이 결코 무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성에 근거한 논리 따위 없이도 자연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내려와야지! 그럼 평생 거기서 살아?”라는 엄홍길의 외침이 심장을 지나 전두엽까지 울리고 만다.     

 바다에 잠겨 있는 아이들의 시신을 옮겼던 잠수사를 어제 만났다. 
품에 안긴 아이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젠 식구들도 안아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거기 있으니 가야만 했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들이 거기에 있으니 계속 기사를 쓰겠다.

- 따옴표 출처: 제25회 민주언론상 본상을 수상한 한겨레 기자의 수상소감

그곳에 사람이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무택이가 있으니 간다. 그것 말고 더 이유가 필요할까. 사람이 그곳에 있다.


 과시하듯, 영화는 히말라야의 장엄한 산맥들을 비추었지만, 설산(雪山)은 아름답지 않았다. 히말라야. 그곳에, 사람이 있어 비로소 마음을 뒤흔들었다. 영화에서 엄 대장과 무택이 함께 죽음의 비바크를 하며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던 순간, 사람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었던 그 순간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웠고, 낭만적이었다. 

 영화를 보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일상의 데스 존에서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기며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 조금씩 잊고 있었던 인정(人情)을 자각한 데서 흘러나온 눈물일 테다. 이 겨울, 情을 느끼고 싶은 우리네 범인들에게 영화 <히말라야>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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