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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May 23. 2017

<불한당>, 변성현 감독

브런치 무비패스 #불한당

그냥 사랑이지 뭐.

     

예컨대, 깊은 밤, 하늘에 총총 뜬 별이 그러하고, 은은한 달빛이 그러하고, 영롱한 술잔이 그러하듯이 느와르는 매개가 될 따름이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만든 변성현 감독은 아무래도 지독한 사랑이야기가 하고 싶었나본데, 그 매체로 느와르를 택했다.     

영화 <불한당> 포스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매체의 질이 좋아야 발신과 수신이 원활한 법이다. 변성현 감독이 서정한 느와르는 신선하고 명랑했으나, 정교함은 부족했다. 무엇보다 서사가 조밀하지 못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불한당>에는 두 주인공 재호(설경구)와 현수(임시완)외에도 요주의 인물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경찰청 팀장 천인숙(전혜진)과 재호가 속한 마약 조직의 수장 고병철(이경영), 고병철의 조카 고병갑(김희원)이 그들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인물들은 소용이 없다. 영화 속 캐릭터가 힘을 가지려면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 명확해야 하고, 인물이 벌이는 행위의 동기가 또한 납득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배경은 정경이 되고, 인물이 벌이는 행위의 동기는 정황이 되어 서사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정경만 존재하고 정황이 없는 상황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행위는 거칠고 소란하여 영화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할 따름이다. 영화 <불한당> 속 인물들의 행위들은 동인이 명확하지 않다. 천인숙 팀장은 대체 왜 그렇게 마약조직을 소탕하지 못해 안달인가? 단지 경찰로서의 직업정신이라기엔, 그녀가 벌이는 일들이 딱히 직업윤리에 맞지도 않아 보일뿐더러 무모하기만 하다. 고병철은 왜 재호를 경계하는가? 왜 조카인 고병갑은 경계하지 않는가? 재호를 경계한다면서 왜 대비하지 않는가? 고병갑은 어째서 고병철에 대적하고, 한재호와 함께 하려 하는가? 영화를 보고 나면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왜’의 향연이 피어난다. 인물에 직업, 연령, 성별 등을 부여한다고 저절로 행위의 동기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물들의 행위 동인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온전히 캐릭터가 성립되고, 비로소 관객들은 인물들 간의 갈등을 납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황이 부재한 채로 촉발된 갈등은 서사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부실한 스토리로 주변의 캐릭터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니 중심인물은 홀로 분주하다. <불한당>의 재호와 현수는 얽히지 못한 채 산만하게 펼쳐진 갈등의 선들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재호와 현수를 지켜보며 내내, 그 둘의 관계 정체성이 의문스러웠다. ‘저 둘은 대체 뭔데?’ 이러한 의문이 발생하는 것 역시 영화에서 두 인물의 관계를 조성해가는 과정이 조급한 탓이다. 다만 수완이 좋고, 기백이 넘치는 두 배우들이 아쉬운 캐릭터와 서사를 비교적 훌륭하게 보강하고 있기는 했다.

재호와 현수. 설경구와 임시완.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내게는 배우 설경구보다도 임시완이라는 배우를 발견하게 해준 영화가 되겠다. 설경구 배우는 원래 섹시했는데? 대사를 소화함에 있어서도, 감정을 연기함에 있어서도 더함과 덜함이 없이 담백한 배우, 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다. 담백하면서 동시에 섹시하기는 어렵다. 부러 밀고 당기지 않는데 제 자리에서 제 온도의 연기를 하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배우 설경구의 노련함이라면, 배우 임시완의 연기에는 소위 ‘밀당’이 있었다. 당기기보다는 밀어내는 경우가 훨씬 많은. 표정도 잘 쓰지 않고, 그렇다고 대사를 소화하는 폭이 넓다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어딘가 사람을 끄는 느낌. 굳이 꼽자면, 눈빛. 힘이 넘치는 눈빛만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 내기 위해 그는 노력하는 듯 보였다.     

훌륭한 두 배우 덕분에, 나는 조금이나마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탐구해 볼 의지를 낼 수 있었다. 클리셰로 점철되어 드러나는 나약한 동인이지만은, 영화 속 인물의 행위의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불신이 깔려 있다. 그 가운데도,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는 말을 쏟아내는 재호와, “아직도 나 의심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현수는 버려진 존재들이다. 재호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내쳐진 아픔을, 현수는 자신이 속한 울타리로부터 반복적으로 버려진 아픔을 가지고 있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신뢰에의 결핍을 토로한다. 두 인물의 연대는 공통의 결핍을 가졌기에 가능하다. 아이러닉하게도, 두 인물은 서로에게 여전히 진실하지 못하지만, 두 인물 간의 연대는 진실이다. 재호와 현수는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서로에게 의지한다. 보는 이가 애틋할 정도로 서로에게 파고든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사랑‥ 그것이 아니면 두 인물의 관계를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영화가 두 인물을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운운하는 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는 이유다.     

결핍의 공유.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느와르라는 매체를 선택했기 때문일까. 사랑이 아니라 믿음에 기대어 웅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래도 느와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이 영 실패한 작전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비록 서사의 조밀함을 확보하진 못하였으나, 독창적인 상상력과 과감한 도전을 통해 구현해낸 장면들은 연출자의 재기를 느끼게 해주었으니. 장면마다 색감이 달리함으로써 영화에 역동성과 흥을 부여하고, 서사의 약점을 조금은 보완해 주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그 아래 암흑에 잠긴 거대한 건물들, 그 사이에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있던 현수. 잊히지 않는 그 장면에서 나는 통쾌함과 지독한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불한당> 최고의 장면이라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는 화려하면서도 처절한 그림.(이 그림만을 위해서라도 다시 영화를 볼 것이다.)

해당 장면은 찾지 못했다. 갈음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다만 내가 애를 좀 쓰고는 있다. 멜로 영화던데, 라고, 영화 어떻더냐는 주변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면, ‘아아 브로맨스~’하는 이가 있고, ‘동성애?’하고 묻는 이도 있다. 그 순간에 나는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냥 사랑.”

이 순간, 이토록 행복한 것을.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괜한 덧붙임인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보고난 후 이 애씀의 경험을 겪으며 문득, 동성애니 이성애니 워맨스니 브로맨스니 규정지어버리는 것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며 확, 싫증이 치밀었다. 어떤 것은, 그것이 약하거나 소외되었거나 차별받고 있을 때 그 부당을 피하고 온당히 이해받기 위해 규정되고 구별되어 더욱 눈에 띄어야 한다. 그렇지만, 규정의 영역에조차 닿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고, 실은 규정과 소외의 관계가 상호적이며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는 혼란함 역시 피할 수 없다.      


 아아,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는 규정할 수 없는 사랑이 너무나도 많고, 사랑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므로.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자! 목 놓아 사랑을 부르자!

사랑이라고.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제목 및 본문 사진의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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