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힐 Dec 29. 2017

<이번 생은 처음이라>, 박준화 연출, 윤난중 극본

드라마는 처음이라..

꿈을 좇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 난 책 읽기를 즐겼다. 그래봐야 어린이 삼국유사, 청소년 문학전집, 청소년 과학전집 같은 책들이었지만, 그 책들을 읽으며 나의 꿈은 쑥쑥 자랐다. 집에 돌아오면 신발도 벗지 않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엎드린 자세로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만 해도 당신의 자식을 기특해 했던 나의 어머니는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지!” 타박하시면서도 흐뭇하게 웃으며 자식의 신을 벗겨가곤 하셨다. 다른 이야기지만, 어머니가 나의 신발을 벗겨 가실 때에, 그러면서 잔잔히 웃으시는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나는 기분이 참 좋았다. 동생만 둘 있는 큰딸이라 드러내놓고 어린양을 부리기는 어려웠으나, 그 순간만큼은 나도 아기가 되어 어머니의 푸근한 돌봄을 받는 기분이었다.     


책은 열심히 보았지만, 텔레비전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보았던 TV프로그램은 딱 두 가지였다. KBS 역사 스페셜과 주말 대하 사극. 이렇다 보니, 나는 친구들로부터 특이한 아이로 취급받았다. 만화 캐릭터나 인기 연예인은 전혀 모르면서 역사적 인물은 줄줄 꽤는. 어딘가 모르게 말투도 어른스러운 아이.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나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만큼이나. 내가 이 다음에 커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이야기하자 심지어 내 친구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너 그거 다하면, 우리 배우는 교과서에 나오겠다. 근데 넌 진짜 그렇게 될 것 같아.”라고.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확실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이 또한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았던 부분이었다. 딱히 무엇을 하고 싶지 않거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몰랐던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그저 꿈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는데.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나도 친구들도. 

    

고백하자면, 이제 와서 나는 부러운 친구들이 많아졌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나를 부러워했던 친구,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던 친구. 그 친구들은 이제 나와는 다르게 사회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어떻게든 제 몫을 해내고 있다. 또 어쩌면 이제부터라도 어떤 꿈들을 꾸면서 자신의 적(籍)을 지켜가고 있다.     


나는. 꿈을 좇는 사람이었는데 ‥ 나는 …      


TV나 보는 중이다. 어린 시절에도 보지 않았던.     


이달 중순, 하던 계약 프로젝트가 끝나서 나는 다시 ‘적을 잃은 사람’(無籍者)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대답할 것이 없어 대답하기 싫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대답해야 할 분위기일 때는 간신히 “아무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적(籍)을, 몸을 둘 곳도, 마음을 둘 바도 헤아리기 어려워 고통스러운 날.     


아무 계획이 없으므로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 내내 TV나 보았다. 한 때 소란하게 지나갔던 예능이나 드라마들을 보고 한숨이 나오는 뉴스들을 보았다. 이따금 어떤 이야기들에 아주 찰나만 가슴이 움찔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감에 싸여 있었다. 영화도 보았다. 하릴없이 하루에 두 편씩 세 편씩 보았다. 전에 좋았던 영화들이나 누가 좋다던 영화들만 골라서 보았다.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는 감흥이 생겨나길 바라서였으나 무감이 깊어지기만 했다. 무엇이나 보다보다 지치면 잠을 잤다. 죽음 같은 세계를 붙들고, 몰두했다. 그러다, 자다자다 더 이상 잠들 수 없게 되면 다시 TV를 켰다.     


한가하고 게으른 이의 한심한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TV나 보는 일은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는지 요일이 바뀌는지 날씨가 변화하는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날들. 고양이는 인간과 달리 신피질이 없어 기억을 하지 못하고 오직 현재만을 산다는데, 내가 꼭 그 모양으로 무엇도 기억할 힘을, 학습할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TV나 볼 태세였으니 어떤 프로그램이든 언젠가는 봤을지 모른다. 박준화 PD 연출, 윤난중 작가 극본의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선택한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단 뜻이다. 그저 있기에 보았다. 이틀에 걸쳐 16부작 전체를 모두 보았다. 이틀 만에 전 편을 다 본 것도 내게는 기록이고, 전 편을 다 본 것도 내게는 기록이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신피질의 기능이 다소 회복되었음을 느껴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나는 조금 고맙다.     


내가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빠져든 것은, 이 드라마가 ‘적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적이 없었다기보다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새 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윤지호. 88년 생, 서른 살. 여성.
한 때 드라마 보조 작가였으나 남성 조감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하고
보조 작가뿐 아니라 글 쓰는 일 자체를 포기.
남동생과 함께 서울 강서구의 주택에 거주 중이었으나
남동생이 결혼을 하고 남동생의 부인이 아들을 임신하자,
평생 가부장으로 행세하며 남성 중심의 사고와 남성 편애 결정만을 해왔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거주하던 곳을 떠나 새로이 머물 곳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됨.
기타: 사소한 일에도 함께 보듬을 수 있는 두 명의 친구 우수지, 양호랑이 있고,
언제나 자신의 편인 어머니가 있음.
‘사랑’이 인생의 꿈. 아직 사랑해 본 적 없음.
남세희. 80년 생. 서른여덟 살. 남성.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IT 회사의 수석.
자기 소유의 타운하우스에 거주,
하고 있으나 대출을 잔뜩 끼고 산 집이라 향후 30년인 2048년까지 꾸준히 빚을 갚아야 함.
기타: 별멍은 좌대출 우고양이. 12년 전 그 일 이후 고양이 외에 어떤 존재에게도 감성을 쏟지 않음. 스무 살부터 함께한 친구 마상구가 있음.
남세희가 선을 긋는 버릇이 있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깊이 의지하는 사이.     


현재의 적을 잃고 미래의 적마저 잃은 사람의 이야기. 마음의 적을 잃고 다시는 현재의 적에 갇혀 지내는 사람의 이야기. 그것이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정체였다. 이야기 속 세상에서 적을 잃은 사람들이 저들끼리 공존하려 애쓰며 차차 적을 회복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깊이 위로받았다.    

 

두 인물이 공존하는 방식은 2년제 입주 결혼 계약이다. 결혼 계약의 시발이 집’이다. 윤지호는 거주 공간이, 남세희는 대출금 상환을 위한 월세가 필요해서, 둘은 하나의 타운하우스를 공유하기로 한다. 월세 계약으로도 충분해 보였던 윤지호와 남세희의 관계가 입주 결혼 계약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서다.     


두 인물의 월세 계약은 남세희 어머니 조명자의 방문으로부터 위기를 맞는다. 연락도 없이 불쑥 아들의 집 문을 열어 재낀 조명자는 “결혼하지도 않을 여자와 왜 함께 사느냐?” “너희 아버지가 너 결혼 안 시키면. 나랑 이혼한단다!” “늙은 어미 모시고 사느니 젊은 아내 데리고 사는 게 낫지 않겠니?” “아버지가 너 결혼하면 대출금도 갚아주신다잖니!” 등 (왜 망언인지 일일이 설명할 의지조차 상실하게 하는) 각종 망언을 쏟아내고 돌아간다. 이 일로 남세희의 집을 떠나, 드라마를 같이 했던 조감독이 마련해 준 거처에서 머물던 윤지호는 바로 그 조감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험을 겪는다.     


일련의 사건들은, 두 인물에게 필요했던 것이 단지 거주 공간과 월세만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두 인물에게 필요했던 것은 실은, 잃어버린 적을 되찾게 해줄 무엇이었다. 이를테면 ‘집’ 같은. 집. 집....... 그러니까 집이란 사는 곳이다. 이때 산다는 것은 총합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몸을 씻고, 쉬고, 때로 누군가와 즐거움을 나누고, 그리고 꿈을 꿀 수 있는 모든 행위의 총합. 그 총합을 물론 제 정체성과 의지에 따른 양식으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공간이라야, 집이다.     


두렵고 끔찍한 위험에서 도망쳐 나온 윤지호가 캄캄한 밤의 거리를 걷고 걸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세희에 집으로 온 것이나, 그런 윤지호에게 남세희가 청혼을 하는 것은 그래서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행위로 보였다. 결혼 이전에 남세희에게 집은, 본인의 책임으로 마련한 것임에도 진정한 의미의 집이 되지 못했다. 불시에 원치 않는 방문을 감수해야 하면서 또한 결혼을 강요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롭게도, 제 정체성대로도 살지 못하고 있음이다. 남세희는 결혼을 통해 비로소 비혼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게 되고, 윤지호는 결혼을 통해 비로소 여성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안전을,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윤지호와 남세희의 입주 결혼 계약이 소위 윤지호의 ‘취집’, 다시 말해 남성인 남세희가 집을, 여성인 윤지호가 가사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로서 여성 혐오 가치관이 반영된 설정이라는 비판이 있다. 윤지호의 입주 조건 가운데 1) 반려묘 먹이 주기, 2) 분리수거 하기 등의 항목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다. 개인적으로, 이는 다소 과장된 해석으로 여겨진다. 앞서의 두 항목은 주거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끼리의 역할 분담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다 윤지호가 남세희에게 월세를 지불하고, 식사 등 생활에 드는 비용과 노동을 모두 각자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2년제 입주 결혼 계약’은 ‘계약’이라고 하는 것의 대체적 속성 때문에 의아하고 차갑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게는 아주 따뜻한 방식으로 느껴졌다. 입주 결혼 계약을 통해 비로소 ‘집’에서 살며 두 인물이 차차 적을 회복할 기회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함께 살다보니 발생하는 ‘서로에게 신경 쓰이는’ 사건들도, 혼인으로 인해 넓어진 관계망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느끼게 되는 기대, 서운함, 미안함, 고마움 등의 감정들도 두 인물에게는 적을 회복할 소중한 기회로 작용한다. 이들이 적을 회복해가는 과정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이기보다 아주 다른 ‘과거력’을 가진 인물들이 연대해 가는 이야기로 그려져 보는 이의 마음이 자꾸 푸근해졌다. 실은 연대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며 결코 피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을까요? - 지호    
 

조심스럽게 염려하고 기다려주는 것. ‘마음은 뺏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는 윤지호의 연대 방식이다.   

   

내 자신으로 온전히 평안해지니까 마음에도 공간이 생겼어요. - 세희


기다리는 마음이 있음을 아는 것.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감수성으로 타인을 헤아리는 것은 남세희의 연대 방식이다.     


현재 머물 곳을 잃는 바람에, 미래에 머물 곳마저 잃어야 했던 윤지호와 오래 전 머물 곳을 잃어버리고 머물 곳이 아닌 곳에 갇혀 지내던 남세희가 연대하며 현재에도 미래에도 머물 곳을, 적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내게 주는 울림이 작지 않았다. 나 역시 현재에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미래에 머물 곳마저 헤아리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조감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험에서 옷가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간신히 도망 나와 ‘정처 없이’ 밤거리를 걷던, 몹시도 위태롭던 윤지호를 보며 나는 그녀가, 그녀가 아니라 마치 나인 것같이 소름끼치도록 외로웠다. 그 사건으로 윤지호는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작가에의 꿈을 접어야 했으니. 꿈을 좇는다는 것은 꿈을 좇는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외로워야 하는 일인 것일까, 싶었다. 여전히 어린 시절의 꿈을 적으로 삼는 내가 과연 계속 그리해도 될까, 싶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는 조금이나마, 나의 소중한 마음을 들여다 볼 용기를 낼 수 있을 듯하다. 여전히 수많은 불빛에 내 몸 하나 뉘일 곳 없는 처지이지만 마음 둘 곳과 몸 둘 곳을, 현재를 둘 곳과 미래를 의탁할 곳을, 나의 ‘적(籍)’을, 적을 위한 ‘집’을 기어코 찾을 수 있도록 누군가는 나와 함께 하여주길. 나는 고양이보다는 달팽이가 되기 위해 바지런히 스스로를 사랑하겠다.


“오늘처럼 하루를 참아도
자꾸 되돌아오는 매일을 살고

혼자 또 한 켠에 서서
정말 혹시나 내일은 다를까봐

잠시라도 괜찮을 나를 그려봐
한 편의 영화 같은 어떤 날을 난.”

* 사진 출처: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공식 홈페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 없는 집>, 김현정 감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