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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여문 실을 따라서

Maison Européenne de la Photographie

by Yule

나는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어쩌면 조금은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턴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LP, 손으로 릴을 돌리며 한 장씩 빛을 새겨 넣는 필름사진, 오랜 시간 고르고 다듬어 마음을 전하는 손 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즘은 휴대폰 앱으로도 카메라 고유의 색감을 흉내 낼 수 있다지만, 공을 들여 구도를 잡고 빛의 양과 감도를 세심하게 조율하며 만들어낸 찰나의 미학을 결코 대체할 수는 없다. 렌즈는 피사체와 빛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하지만, 그 안에는 사진가의 시선과 해석이 주관적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사진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 위에 나만의 관점을 한 스푼 녹여낼 수 가장 아날로그적인 화폭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잘 찍지는 못하지만, 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있는 편이다. 첫 필름 카메라였던 로모를 시작으로, 어쩌다 보니 다루기 어렵고 무거운 친구들만 모여서 출사는 자주 나가진 못하고 있다. 그래도 카메라 구경하는 일만은 확고하고 확실한 취미가 되었다. 특히 여행을 가게 되면 오래된 플리 마켓에 들르거나, 나의 로망 라이카 매장이 있는지 꼭 찾아보곤 한다. (빨간 콩 적금 만기가 곧 다가온다. 두근두근).

물론 근처에 사진전이 있다면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파리에는 무려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유럽 사진미술관 (Maison Européenne de la Photographie, MEP)이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현대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MEP는 유럽 현대사진의 흐름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전시뿐 아니라, 비디오 아트, 멀티미디어 설치, 다큐멘터리 필름 등을 통해 현대 이미지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 거기에 연구자와 학생들을 위한 전문 포토그래피 라이브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비록 '유럽'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전 세계 사진 예술을 균형 있게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메인 전시는 Marie‑Laure de Decker의 회고전인 "L’Image comme Engagement"다. 한 사진작가가 전 생애동안 촬영한 사회적, 역사적 현장의 기록과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구를 담고 있었다.


Marie‑Laure de Decker는 베트남 전쟁, 차드 반군, 아파르트헤이트, 칠레 독재 저항 등 세계 곳곳의 전쟁과 분쟁의 한가운데를 누비며, 그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히 기록한 사진가였다. 그녀의 사진은 핏빛 폭력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마주한 일상의 단편을 끌어올린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이 아닌, 그 안에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녀의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은 단지 피사체가 아니라, 존엄을 가진 존재로 서 있다. 그 사실을 토대로, 전쟁의 참상과 피해자들의 인권,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책임과 연대의 필요성을 천천히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그녀의 밀도 있는 인간성 탐구는 수많은 인물 사진으로 구현되었다. 마르셀 뒤샹, 만 레이와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당시 문화적·정치적 인물들을 포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다양한 초상을 렌즈에 담아냈다.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카메라와 함께, 사랑하는 존재들과 한 프레임 속에 녹아든 그 익살스러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자화상을 보고 나니, 나 또한 내 순간들을 더 많이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점점 셀카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워지는데, 이 또한 나의 순간을 사랑하고 내 존재를 기록하는 일이라면 뭐 더 당당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사진가가 자신의 존재를 이미지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어쩌면 다층적으로 쌓여가는 삶의 기록자로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자 하되, 그 속에 주관을 머금은 사진이라는 세계는 곱씹어 볼수록 객관성과 주관성이 공존하는 나와 많이 닮아있다. 어떤 피사체를 바라보고, 어떤 구도로 프레임을 구성할지, 그리고 어떤 순간에 셔터를 누를지 결정하는 과정 속에 나와 피사체 사이를 흐르는 공기, 그리고 기다림이 빚어낸 시간의 층위가 쌓여간다. 그 모든 순간을 신중하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해보고 싶다. 빛이 그린 그림이 선물하는 찬란한 나의 기록들이, 오래도록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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