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rse de commerce, Pinault Collection
이번 여행의 핵심은 시간의 한계를 두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짜인 시간표가 아니라 우선 지역만 대략적으로 정해두고 발길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거닐어 보기로 했다. 평일 오전임에도 흥이 넘치는 길 위의 악사들의 비긴 어게인에 잠시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잠시 몸을 녹이러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서기도 한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이렇게 즉흥적이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모여 낯선 이야기가 되고 새로운 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은색 깃발이 나부끼는 오늘의 공간에 도착했다. Bourse de commerce, Pinault Collection
사실 여기는 마음에 저장해 둔 목적지였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순례자로서 필연적이겠지만, 시간이 품어온 오래된 공간에 근현대 미술이 물결이 어떻게 흐르고 있을지 궁금했다. 더욱이 전시 중인 아르떼 포베라 (Arte povera)가 산업화 통한 대량 생산에 반대하여 가능한 가공되지 않는 재료들로 현대와 전통을 융합한다는 점에서 이곳과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면 일단 다가가 보는 게 인지상정!
일단 사람이 많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첫눈에 모든 것이 담길 만큼 탁 트인 시선 그리고 자연광이 스며들며 만들어 내는 돔의 그림자까지.. 시작부터 공간과 가까이 스킨십을 할 수 있었다. 지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바지런히 오르내리며 건물의 구조와 레이어를 파악하고, 어디서부터 작품을 보면 좋을지 나만의 설계도를 짜기 시작한다. 때론 가이드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엉뚱한 나만의 해석을 가미하면 좀 더 특별하게 이 공간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아르테 포베라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 1960년대 시작된 예술 운동이다. 빈곤한 재료와 단순한 과정을 예술의 영역에 수용하여 물질의 본성을 탐구하고, 물질이 가지는 자연 그대로의 특성을 예술로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난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 조금은 익숙하기도 하고 세상을 수평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자 자연성과 장소성을 강조한 작품들은 어쩐지 반갑기도 했다.
특히 나무를 매개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주세페 페노네 (Giuseppe Penone)의 작품들에 깊은 여운이 남았다. 한 오브제를 가지고 모여 앉아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모든 작품들은 각기 다른 재료, 형태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결코 본질적인 무언가에 도달하고자 함을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에 감사한 건 물리적 요소와 비물리적 요소가 만나 우리에게 존재와 사고를 동시에 일으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물리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고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일생에 한번 과거가 현대를 품어 그 공간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존재로서의 사고를 일으키는 마법 같은 순간이 필요하다면 이곳에 한번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추천한다. 반나절 여유롭게 머무르며 몸과 감각을 통해 경험하다 보면 인생의 여러 고민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기 쉬운 녀석을 만날 수 있다. 벽장 속에서 튀어나와 까만 눈을 반짝이는 아주 작은 친구는 (아주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귀를 기울여야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I... I... I..." 자신의 말들을 끊임없이 삼켜내고 있었다. 이 자그마한 존재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시선을 맞추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한마디 건네주고 왔다.
" 걱정하지 마. 사라지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