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ée de l'Orangerie et Fondation Monet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타원형 캔버스 그리고 천장의 자연 채광 방향에 따라 물 위로 스며드는 음영, 찰나의 일렁임, 그리고 보이는 것 너머의 색의 변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초록빛 튈르리 공원이 품고 있는 새하얀 정원,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지만, 감히 클로드 모네가 남긴 시간과 감정의 인상을 마주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말하고 싶다.
모네의 조건에 따라 설계되고 완성된 이 공간 (Les Nymphéas)은, 전시 형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설치로 평가받는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들어서는 순간, 40여 년간 그의 곁에서 창작의 영감이 되어주었던 수련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감상에 빠져들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모네는 수련 연작 8점을 평화의 헌사로 프랑스 국민에게 기증했다.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시대의 상처 위에 예술로 위로를 건넨 성소와 같은 공간인 것이다. 전쟁 후의 심리적 회복과 치유를 염원하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운 미술관을 세상에 남겼다.
작년 여름에는 엄마와 오랑주리 미술관을, 올해 봄에는 클로드 모네가 생애를 바쳐 완성한 ‘수련’의 정원과 연못을 찾아 지베르니를 찾았다. 모네는 매 순간을 살아 있는 감각으로 붙잡아낸 화가이자 부지런한 정원사이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로 약 한 시간 거리, 노르망디에 위치한 지베르니는 영국과 날씨가 비슷하다고 하더니, 가는 길 내내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준다. 덕분에 새벽이슬을 머금은 형형색색의 화단 정원 (Clos Normand)엔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인위적인 대칭이나 정형화된 디자인이 아닌 저마다의 개성이 자유롭게 펼쳐진 정원에는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튤립, 아이리스, 양귀비, 해바라기가 신비로운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네의 예술 세계가 현실로 구현된 장소라 할 수 있다.
수련 연작의 배경인 수련 연못 정원(Jardin d’Eau)은 모네가 직접 물을 끌어와 인공적으로 만든, 동양적 정취가 깃든 정원이다. 그는 이곳을 단순히 감상의 공간으로 두지 않고, 계절과 빛,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반응하는 아틀리에로 가꾸었다. 1914년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이 정원을 바라보며 무려 약 250점에 이르는 수련 연작을 남긴다. 같은 장소지만 해가 뜨고 지는 시간, 흐림과 맑음, 바람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과 분위기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 변화의 찰나를 화폭에 옮겼다. 사실 오는 길목 맑지 않은 날씨에 흐린 정원의 표정을 마주하게 될까 품었던 걱정이 무색하게, 정원은 더 투명하고 오묘한 빛깔을 선사했다. 어쩌면 오늘의 습도, 구름, 바람 또한 그의 어느 습작에 녹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것마저 선물 같은 일이었다. 모네와 공유한 어느 평범한 일상이랄까?
모네의 그림을 깊이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뜬금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앙리 브레송 작가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나에겐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정적이면서도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두 예술가는 어딘가 닿아 있는 듯하다.
두 세계의 작품에 가만히 몰입하다 보면, 붓질이 만들어낸 빛 속에서든, 혹은 빛과 그림자의 노출이 만들어낸 기하학적 구도 속에서든, 내면을 비추는 조용한 거울이 나타난다. 빛이라는 비물질적 대상을 형상화하려던 작가들은 어쩌면 찰나의 순간을 긴 사유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해,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건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감각을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모네의 집(Fondation Monet)을 나와 Rue Claude Monet를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성당과 모네의 가족 묘지에 닿는다. 마을의 조용한 골목길을 걸으며, 이토록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내면을 가득 채워준 예술가에게 조용히 감사를 전했다. 어쩌면 모네가 아니었다면 평생 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아름다운 지베르니에서, 자연과 인간, 예술이 어우러진 시적 공간을 누려보았다. 이제 그의 작품을 통해 들려오는 나의 마음의 목소리에 주파수를 맞춰본다.
" 마음속 선명한 빛을 따라 걸어보자.
그 빛은 반드시 나를 안아줄 풍경으로 데려다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