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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Shakespeare and Company

by Yule

파리라고 하면 어쩐지 멜랑콜리하고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지만 항상 다양성의 수용성이 높은 편이라고 느낀다. 사실 살아보지도 않고 얼마나 알겠냐만은 적어도 다른 대도시에서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세상의 물결에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구축하는 힘, 다른 이의 세계와 취향을 존중하는 미학 그리고 이를 거리낌 없이 발현하는 소통의 장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솔직히 관용 (tolérance) 까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친구 혹은 유학생이던 지인들과 토론을 할 때면 아슬아슬 줄타기 같았던 대화의 층위와 넓이가 참 좋았다.


그런 포용성 때문일까 파리에는 정말 많고 많은 서점이 있지만 생각보다 특별한 서점들이 있다. 그리고 지도를 펴고 서점 지도를 그리다 깜짝 놀라기도 한다. 대형서점, 독립서점, 중고서점을 가리지 않고 영어서적들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문학이 가지는 국가적 자부심과 모국어 사랑을 익히 잘 알고 있는지라 더욱 새로웠던 것 같다. 무엇이 이 콧대 높은 도시를 이토록 자유롭고 포근하게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영국문학은 개인주의적이고, 독일문학은 관념적이며
프랑스 문학은 사회적이고 사교적이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에 첫 발을 디딘 1919년, 이 도시엔 또 다른 이유로 영혼의 빛을 잃어버린 청년들이 찾아들었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 원정군들과 전쟁의 참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미국의 젊은 작가들은 당시 유럽의 국가들로 도피하듯 스며든다. 그중엔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지금은 대 문호가 된 작가들이 중심에 있었다.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해지는 이들은 전쟁으로 인간본연의 정체성을 잃고 그야말로 허무주의에 빠져 버렸다. 그렇게 길을 잃은 낯선 이방인들이 드나들며 몸을 녹이고 부서진 영혼을 치료한 곳이 있다. Shakespeare and Company

그 시절 책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오데옹로 12번지에 있는 실비아 비치의 책방 겸 대본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책을 빌려보곤 했다. 찬바람이 부는 날 대형 겨울 난로를 피워놓은 이곳은 따뜻하고 쾌적했다.

-움직이는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금은 파리 시테섬 동쪽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Shakespeare and Company 서점은 1919년 Rue Dupuytren 8번지에 첫 문을 열었다. 이제 유명해져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파리에 온 이방인이라면 한 번쯤은 꼭 가봤으면 하는 장소이다. 오랜 기다림 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서면 시간에 바랜 낡고 앤티크한 공간이 나타난다. 방과 방이 이어지고 저마다의 테마가 흐르듯 녹아있어 베스트셀러 위주의 큐레이션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 많아 그저 이 아늑함에 콕 들어박히고 싶을 뿐이다.


사실 오랜 전통으로 서점 2층엔 1인용 소형침대 그리고 타자기가 놓여 있다. 이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는 여행 중인 작가나 지망생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조건은 간단하다. 타자기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하루에 책 한 권 읽고, 일손이 모자랄 때 서점일을 돕는 것. 누구라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환대받을 수 있는 이 너그러움은 단지 이곳이 책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곳엔 사람이 끊임없이 오가고 이야기가 머문다. 낯선 이들 환대하고 그들이 책 속에서 헤엄치며 인간성과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그저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유명한 문인이 다녀간 까닭에 그 의미가 더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일상처럼 독립적인 존재들이 모여 책과 사람이 연결되어 소통하고,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그리고 공간은 날마다 축제처럼 자리한다. 책을 구매하면 면지에 기념 도장을 찍어 줄지 묻는다.

"Oui, je veux me rappeler cet endroit."

그렇게 프랑스어 필사를 위한 어린 왕자 양장본과 사랑이 가득한 시집을 품에 안고 나왔다. 멀리 노트르담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적처럼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이 내 안에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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