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Germain-des-Prés
유럽은 각 도시마다 유구한 역사를 품은 대학들이 터주대감처럼 자리하지만, 대도시 안에도 잘 찾아보면 숨은 그림처럼 오래 그 자리를 지키는 유서 깊은 대학들이 있다. 모두가 꿈꾸는 낭만 가득한 커다란 캠퍼스는 아니지만, 그 장소가 바로 파리의 지성과 문화의 거리 생제르맹 데 프레( Saint-Germain-des-Prés) 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제르맹 대로와 생 미셸 거리가 교차하는 생제르맹 데 프레는 센강을 따라 예술과 사상 그리고 문학의 운율이 흐른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당시 필요했던 책자와 전단지를 출간했던 장소로 지금도 앙드레 지드, 쌩택쥐베리를 포함한 대문호룰 탄생시킨 NRF를 비롯한 수많은 출판사들이 모여있다. 작가, 철학가,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던 카페들 그 옆에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서점은 그래서 저 마디의 모양으로 길마다 가득 차 있다. 그 시작은 생제르맹 대로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동서남북 어디로 걸어도 배움의 장이 흘러 나온다.
우선 생제르맹 거리에서 앵발리드 방향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프랑스 최고의 사회과학 대학인 시앙스포 (Sciences Po)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엘리트주의의 상징으로 정치권력의 요람으로도 불리는 그랑제꼴이지만 (사악한 학비는 덤), 국제적인 커리큘럼과 연구소의 반짝이는 연구주제들에 항상 눈여겨보게 되는 대학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여기 출신인데 파리에 간다고 하니 학교 머그컵 하나를 부탁했다. 학교도 구경할 겸 둘러본 서점. 갑자기 부슬비가 내려서 한참 추위에 떨었는데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 주신다. 정갈한 분위기에 주로 학생들이 오는 서점이어서인지 뭔가 사랑방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한강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발견해서 내적 친밀감을 적립했다.
다시 생제르맹 대로로 나와 센강 방향으로 조금 더 걷다 보면 Saint Pearl이라는 작은 카페가 나온다. 동료의 추천 메뉴였던 차이라테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파리지엔느인척 해본다. 워낙 작은 카페여서 옆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분위기가 아늑해서 앉은자리에서 샀던 책을 다 읽고 나왔다. 다시 힘을 내 계속 강을 향해 계속 걷다 보면 천천히 갤러리와 화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의 건축이 공존하는 국립미술대학 에콜 데 보자르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그리고 국립 고등 건축대학 (National School Supérieure D'architecture Paris-Malaquais - University Psl) 을 함께 찾을 수 있다. 파리의 예술, 디자인, 건축이 한자리에 모인 융합이라니 공간 자체로 멋지지 않은가! 학교 갤러리도 있어 전시가 있다면 학생들의 작품도 관람할 수 있다.
다시 생제르맹 대로로 돌아와 이제 남쪽 뤽상부르그 공원까지 이어진 길을 찬찬히 걸어 내려간다. 의과대학으로 유명한 파리 시티대학 (University Paris Cité, Odéon)과 소르본 대학 (Sorbonne Université)까지 하나의 거대한 대학가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라탱 지구까지 하나의 연구단지처럼 이어진 학문의 숲은 마치 혈관처럼 서로 연결되어 지식과 혁신을 파리의 심장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시는 학생들에게 너른 마음을 열어준다. 거리마다 학생들이 저렴한 가격에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중고서점이 가득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San Francisco Book.Co에 들어섰다. 책 가판에 한 어르신께서 한참 책을 고르고 계셨다. 책을 사고팔 수 있는 곳이라 읽고 있던 책을 팔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책을 가져가신다. 마치 숨을 쉬듯 사람들이 자연스레 책방에 오가는 이 자유로움은 이 도시의 여유와 참 닮아 있다.
만약 나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나의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이 지성과 문화의 거리 위에 서있는 학생이어도 좋을 것 같다. 아마도 매일 좋아하는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읽고 싶은 책을 찾고 있겠지. 어쩌면 길만 걸으면 이어지는 대학들과의 소통에서 학문의 통섭을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며 가장 절절히 느끼는 것은 이 복합적인 문제를 단일한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환경과학, 경제학, 정책학, 심리학까지 서로 다른 학문 분야가 경계를 넘어 통찰을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지만, 실무에선 어려움도 많다보니 더 전문적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다들 일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서 꿈결같은 도심 캠퍼스 속를 걸으며 작은 용기를 얻어간다.
방학기간이어서 학생들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봄이 오면 활기찬 이 거리를 다시 한번 걸어봐야겠다. 배움의 강이 흐르고 탐구의 길을 따라 학문의 꽃을 피워내는 활기찬 봄의 캠퍼스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