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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May 24. 2023

구름이 그린 날개 위로

St Benedict's Monastery_성 베네딕트회 요셉 수도원

"스리랑카에서 어느 여행지가 가장 좋았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중부여행길을 꼽을 것이다. 깊은 산세는 언제나 각지고 험준하지만 대지 위 태초의 장막이 걷히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호튼 플레인즈의 일출은 아직도 경외감으로 남아있다. 스리랑카 내 가장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국립공원이기도 한 이곳은 평야(plains)라고 불리지만, 초원, 숲, 호수, 폭포와 같이 걸으면 걸을수록 다음엔 어떤 모습이 나올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게 해 뜨면서부터 오전 내내 9km가 넘는 트래킹을 하다 보면, 생명으로 가득 찬 아득히 넓은 이 땅에서 텅 비어진 광야 같은 나를 마주하게 된다. 자연을 벗하며 걷는 사색의 길은 어느새 성찰의 여정이 되고 그렇게 그 길 끝에 오아시스 같은 성 베네딕토 수도회 (St Benedict's Monastery, Adisham)에 다다랐다.

구름 위를 산책하다 


해발 1,575m 고요한 안갯속 스리랑카 지붕 위에 지어진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포근한 안락의자처럼 모든 이에게 잠시 쉬어 갈 자리를 내어준다. 아디샴 방갈로우 (Adisham Bangalow)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20세기 초 스리랑카에 거주하던 영국 귀족 Thomas Viller경의 별장이었지만 1961년 수도회에서 인수하여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망토 같은 수도복을 입은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 성인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아주신다. 그리고 올망졸망 꽃망울이 재잘대는 듯한 그림 같은 정원과 성모님이 올려다 보인다. 저 너머 정원 가운데엔 예수님 모습이 빼곡히 보이는데 마치 하나의 야이기처럼 이어진다. 신기한건 총 천연색의 꽃과 물상들이 조화로움을 해치지 않으며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게 자유로운 듯 하지만 수도원의 오랜 규칙과 원칙을 따르며 영성을 가꾸어 나가는신앙과도 참 많이 닮아있다.

수도회에는 수사 일곱 분 정도가 머물며 수도생활과 동시에 하프탈레교구 지역사목을 하고 계신다. 이곳은 모두에게 주말 또는 공휴일에만 입장이 허락되지만 미사는 주일 새벽 7시 에만 있어 성당내부를 볼 순 없었다. 워낙 다양한 종교와 배경의 사람들의 자유롭게 방문하는 관광지여서이기도 하지만 인근 교우들이 대부분 차농장 노동자로 성당을 찾기가 쉽지 않아 신부님들이 인근 지역 성당을 방문하셔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도회에서의 특별한 새벽미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피정의 집과 같이 열려있는 숙소에서 하룻밤 묵는 방법도 있다. 아침 이슬 맺힌 주님의 새벽정원을 거닐며 기도 속에 오래 머무는 미사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진다. 수도회는 봉쇄 구역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수도하는 공동체이기에 일하며 기도하는 수사님들이 직접 가꾸고 재배한 과일로 만든 수제잼도 만나 볼 수 있다. 그 중 오디잼은 사랑이다! 

산기슭에 포근히 둘러쌓인 영성 


처음부터 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보던 교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시 현지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지어진 영국 시골저택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호젓한 전원의 미를 가득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푸르른 불암산 산기슭에 자리한 나만의 비밀 아지트 성 베네딕토회 요셉 수도원이 함께 떠오른다. 대규모 배과수원으로 유명한 요셉 수도원도 봉쇄구간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열려있어 계절의 순간을 벗하며 오래 걷고 싶을 때 꼭 찾는 곳이다. 어디를 보아도 그저 하느님의 손길이 스쳐 만들어진 것들만 시선에 담기기에 걷다 보면 내 안에 해묵은 상념을 꺼내어 마주 볼 수 있게 해 준다. 애디샴처럼 이곳에서도 수사님들과 수녀님들이 직접 생산하는 배즙과 소시지를 만들고 노동을 통해 이 아름다운 공간을 가꾸고 계신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도 언제나 대문을 활짝 열어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삶의 규칙을 지키며 공동체의 기도로 영성을 쌓으며,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면서 공동체로 신성한 노동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삶.  단순하지만 숭고함이 녹아있는 삶이 녹아있는 닮은 듯 다른 두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심에 감사한 마음이다. 


산 능선을 타고 온 어느 천사의 날개가 펼쳐진 구름결을 홀린 듯 걷고 있는데 배나무 가지 정리로 분주한 수녀님이 빙긋 웃으며 다가오셨다. 지난주 으름꽃이 처음 꽃망울을 터트렸다며 덩굴 속에 피어난 소박한 꽃송이를 정성스레 소개해 주신다. 바쁜 와중에도 작은 생명체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감탄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소소하지만 완벽한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마음결이 그저 감동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낮은 자세로 순명하며, 조화롭게 자신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삶은 이렇게 향기롭다.


구름 위 수도회에 서서 아직 긴 여정 위에 있는 나의 삶을 내려다보며 품었던 다짐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아직도 노력보다는 요행을 바라고, 배려하려기 보단 다시 돌려받고자 하는 감정들이 내 안에 변덕스럽게 흩날린다. 희망을 위한 희생이라는 씨앗을 품기에 아직 내면의 토양이 충분히 건강하지 못한 모양이다. 새하얗게 펼쳐진 구름이 그린 천사의 날개 위에 다시 한번 나의 다짐을 써 내려가본다. 불완전한 난 또 같은 고민과 상념으로 씨름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거울처럼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에 오늘처럼 머물러야겠다. 느려도 괜찮다. 천천히 부지런히 나아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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