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lica of Our Lady_목포 산정동 성당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본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도드라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수줍음이 많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방법은 식사 전후 긋는 성호경이나 묵주반지 정도다. 그래서 일상 속 선물 같은 조우는 영적 친근감을 배로 만든다.
사무소에 새로 들어온 니샤와 손발을 맞춰가던 어느 날, 결재판 위 그녀의 은색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반짝이는 십자가가 너무도 선명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니 집안 식구가 모태 천주교 신앙인이란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내적 반가움을 표현하는 그녀에게 올해부터 스리랑카의 성당 기행기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그녀는 랑카에서 꼭 가봐야 하는 성지와 성당을 쏟아낸다. 혹시 성당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싱할라어로 쓰여 찾지 못하는 정보가 있으면 직접 번역을 해주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런 그녀가 콜롬보에 산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소개한 장소가 바로 이곳 '랑카 성모 대성전' (Basilica of our lady Lanka)이다. 콜롬보 북쪽 라가마에 위치한 국립 순례지인 이곳은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는 준대성전이다. 인도양을 상징하는 푸른색 지붕과 타지마할을 떠올리게 하는 성면의 얼굴이 전통적인 듯하면서도 어쩐지 이색적이다.
바실리카는 우리말로 대성전으로 번역되지만 규모가 크다고 다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바실리카는 교황 바실리카 (Basilica Major: 교황이 특별한 전례를 행하는 대성당)와 소 바실리카 (Basilica minor: 해당 지역 교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성전, 기념 대성당, 준대성전)로 나뉘는데 소 바실리카는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에 붙여진다고 한다.
이곳에 랑카 성모 대성전이 봉헌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콜롬보 대교구장인 장 마리 마송(Jean-Marie Masson, 1876~1947) 대주교는 1911년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님을 위한 봉헌된 초기 성전 동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셨다고 한다.
"랑카가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이곳에 성당을 봉헌하겠습니다”.
성모님의 은총 덕분인지 일본군은 서부 해안 인근을 몇 차례 공습했을 뿐 섬 본토까지 침략하지 못했다. 이에 전쟁이 끝나고 1948년 비오 12세 교황은 이 땅에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바실리카를 짓는 것을 승인한다. 또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스리랑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이에 후임을 이어받은 토마스 쿠레이 추기경(Thomas Cooray, 1901~1988)은 27년에 걸쳐 약속한 성전 걸립을 완성하였고 1974년 2월 교황 바오로 6세를 통해 대성당 봉헌과 랑카의 성모상 대관식이 거행된다. 명실상부 국가를 대표하는 대성당이 된 이곳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교, 힌두교도들도 미사에 참여할 만큼 성스러운 순례지로 자리 잡는다.
성전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작은 그리고 제단 뒤편에 실물 크기 랑카의 성모자상을 두 번 맞이하게 된다. 쿠레이 추기경은 1950년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같은 조각가를 통해 랑카만의 성모자상을 만들었다. 조각상은 교황 비오 12세의 축복을 받기 위해 로마로 옮겨졌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신자들을 만나고 있다.
새하얀 자태의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성모 마리아는 왼손으로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계신다. 왕관을 쓰고 황금 별을 가슴에 단 아기 예수님은 오른손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직접 선물했다고 알려지는 이 묵주는 세상에 하나뿐인 랑카의 성모님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 뒤편에 230cm 정도 되는 실물 크기의 성모자상은 눈 덮인 산봉우리에 서계신 순백의 자태로도 눈이 부시지만 성전 위로 쏟아지는 별빛이 어우러져 신비함과 탄성을 자아낸다. 마치 후광처럼 반짝거리는 별들은 메시지를 드러내는 빛이 되어 성전을 수호하고 있었다.
대성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기존 로마 가톨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우선 건축 당시 국가의 교구 수를 나타내는 6개의 기둥이 건물 중심을 지지하고 있으며, 거미줄 모양의 원형 유리 위로 청동 그리스도 십자가가 놓여있는데 이 모양은 인도의 아잔타에 있는 초기 불교 사리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지붕에 양쪽에는 금빛 큐폴라 모양의 첨탑은 힌두교 고푸람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야말로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아닌 랑카를 구성하는 모든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랑카만의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 이곳에 성전 부지를 마련할 때 교구는 인근 고무농장을 인수하여, Neem, Na, Kohomba와 같은 향토 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결실로 지금 성지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초록 초록한 쉼터가 조성됐다. 이곳의 나무들이 대부분 가톨릭 전례를 위한 향목으로도 쓰이고 조달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아낌없이 나눠주는 화수분이 아닐 수 없다.
성전의 외벽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스리랑카 교회사 전체를 기록한 45개의 청동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조각가 Sarath Chardrajeewa가 만든 이 청동 부조는 고대 기독교의 시작에서부터 국가의 위기 때마다 함께 걸어온 문화, 역사, 유산에 대한 가톨릭의 공헌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나무 수풀을 헤치며 십자가의 길을 걷듯 성전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단단하고 지켜낸 그 귀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서소문 역사 성지 공원을 한 바퀴 걷고 순교성지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눈앞에 펼쳐진 빼곡한 역사는 듣고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대성전 지하에는 쿠레이 추기경의 무덤이 있다. 스리랑카인으로 최초의 추기경이며, 현지인으로 처음으로 콜롬보 대교구장이 된 인물이다. 우리에겐 그립고도 그리운 김수환 추기경님과도 같은 분이랄까? 그는 약 30년간 교구장으로 재임하며 랑카 성모 대성전을 지어 봉헌했다. 실제 랑카 성모자상도 직접 도안할 정도로 큰 열정을 보여 주셨으며 1988년 선종한 뒤 자신이 세운 성당에 묻히셨다. 쿠레이 추기경은 생전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헌신한 사제로 깊은 존경받았다고 한다. 그가 선종한 뒤에도 그를 추모하는 신자들은 현재 시복시성을 추진 중이다.
물론 한국에도 준대성전이 있다. 2021년 5월 10일 로마 교황청 준 대성전 칭호를 승인받은 산정동 성당이다. 가톨릭 목포 성지 내 자리하는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의 첫 본당이자 한국 레지오 마리에의 발상지기도 하다.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정동 언덕에는 멀리서도 우뚝 솥은 성당의 두 탑을 찾아볼 수 있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첫인상은 다소 딱딱해 보이지만 입구에서 메모리얼 타워를 통해 말씀을 따라 오르다 보면 구름을 타고 하느님의 땅을 밟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성전 안팎에는 희생으로서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는 분들의 기록이 놓여있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광주대교구 제4대 안 파트리치오 몬시뇰 교구장, 산정동 성당 토마스 쿠삭 주임 신부, 존 오브라이너 보좌 신부님의 사목지기도 한 이곳은 순교 기념비로 그 아프지만 숭고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제대 가운데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못 박히고 매달려 숨을 거두신 십자 나무의 조각인 성 십자가 보목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제대 양 옆으로 국내 교회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예수님의 작은 꽃 성녀 소화데레사 그리고 성녀의 부모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야말로 준대성전이기에 간직할 수 있는 성적인 존재들로 가득하다.
랑카 성모 대성당은 정말 하루 종일 보아도 시작이 부족한데, 그렇기에 대성전이 끝이 아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녀원, 박물관 그리고 프랑스 루르드 성모님의 성전 그리고 그 아래로 동굴을 볼 수 있다. 특히 루르드의 동굴은 프랑스의 성지처럼 정교하게 조성되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화강암 암석을 직접 채석하여 만들었는데 대성당이 봉헌된 2월 랑카 성모 축일 외 3월 어린이날, 8월 병자들을 위한 축일을 이곳에서 기념하고 미사를 집전한다고 한다.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인데 숲 속 깊은 골짜기 작은 산장에 온듯한 평안함 그리고 피톤치드의 향연이 펼쳐진다. 차분해지는 마음만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지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는 축일엔 니샤의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물 같은 메시지도 찾아보고 함께 나란히 걷다 보면 서로에게 신앙이 자라나는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