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헌법재판소의 ‘탄소중립법 헌법 불확치’ 판결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기후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자는 주장을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제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근무하면서 새마을 지도자들에게 많이 강조한 내용입니다. (이하, 염홍철 <새마을 인문학> 97~99 참조)
‘두려움’을 떠올리면,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공감을 느꼈던 소설이면서, 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납니다. 이 소설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찬사도 많이 받았지요. 크레타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그 유명한 묘비명에 두려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글입니다. 욕망을 거세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어져야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묘비명을 인용하기 때문에 ‘자유’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대한 반대의 언급도 있습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느껴야 된다는 것이지요. 두려움이 있어야 간절함이 나온다는 점에서 카잔차키스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렇게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오른 카잔차키스보다는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두려움’에 대한 성찰에서만큼은 더 깊이 공감이 가네요. 두려움은 나약함이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마주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배려입니다. 사랑이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람을 더 안전하게 이끌고, 사업의 취약점을 보완하며, 인류가 처한 재앙에 준비할 수 있게 합니다. 젊은 시절, 사랑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많은 ‘연습’과 ‘준비’를 하였지요.
사실 기후위기가 본격 거론된 것은 30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협상만 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량 저감에 대한 각국의 선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가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고된 첫 시점인 2050년이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보건 전문가들이 대규모 전염병을 경고했지만,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도래해서야 허둥지둥했지만 대응이 늦어서 세계 모든 나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희생을 치렀지요. 현재 보수적인 예측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정부 정책, 기업 경영, 그리고 기술 발전이 책임지고 대응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 게이츠인데, 그는 우리가 보유한 ‘기술’과,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의 가정을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후위기는 심각합니다. 두려움을 갖고, 절박한 심정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