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11월 29일

by 박유미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갖가지 풍경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손녀보다 어린 직원을 깍듯하게 존대하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와 이제 막 백일을 넘기고 엄마 품에 폭 안겨서 이곳을 찾아온 아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긴 생머리의 가녀린 아가씨, 외국인 배우자를 얻고 싶어서 열심히 서류를 준비하더니 어느 날 의기양양하게 어린 아내의 손을 잡고 온 노총각,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가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당신의 입으로 직접 해야만 했던 어머니, 전국 곳곳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건물주와 당장 한 끼 해결하기 어려워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온 독거 어르신.


내가 그 풍경의 외부에서 관찰자 역할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님이 고맙다며 내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떠나실 때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마음이 답례를 드린다. 내가 몇 달 전 출생신고를 받아 놓은 아이가 통통히 살이 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볼 때는 서류 위의 산파가 된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온다.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기분 좋은 소식과 참담한 비은 붕 떠오르고 부르르 떨며 내 몸을 쭉 통과해 지나간 다음에야 딱딱한 활자가 된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주민등록증이 기대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는 학생의 해사한 얼굴은 내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개인회생 신청을 도와줄 때와 국가장학금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해줄 때는 서로 다른 무게의 표정들을 만난다. 건물에서 불이 나 셋방 사는 동생이 죽었다고 시체검안서를 내미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위협을 하는 사람이 오는 날도 있다. 큰 덩치의 젊은 남성이 눈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욕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준법이고 뭐고 간에 내 안위를 걱정하기에도 숨이 막혀온다. 어떤 날은 친절하게 응대해주어 고맙다며 수줍게 주머니에 있던 껌 두 개를 책상에 놓고 가기도 한다. 떠나기 전에 굳이 남기는 칭찬에는 진심이 콩닥콩닥 뛰고있는 것 같아 좋다. 따뜻한 말들을 품고 있다가 내려두고 가시는 이런 좋은 분들이 훨씬 많기에 종일 손님들의 치다꺼리를 하는 사무실의 삶도 나쁘지 않다.


실수로 의료보험증을 가위로 오려냈다고 울상 짓는 백발의 할머니가 내게 도움을 청하셨다. 갸우뚱 했다가 할머님의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재발급은 여기에서 할 수 없지만, 제가 테이프로 붙여드릴 수는 있어요.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진심과 만나고 가끔은 조각난 종이를 이어붙이는 것만으로도 사무실은 꽤 괜찮은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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