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민보, 이상하고 좋은 사람

남편에게 배우는 사랑과 삶

by 박유미

나는 남편을 '민보'라고 부르고, 남편은 나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사랑이라니. 우리에게는 너무 일상적인 호칭일 뿐이라 그게 어마어마한 단어였다는 걸 이제서야 눈치 챈다. "밥 먹어요, 사랑.", "다녀올게요, 사랑.", "사랑, 그거 봤어?". 말이 외로울까봐 언제나 따라다니는 추임새처럼 사랑이 이어붙는다. 남편은 자기 전에, 혹은 밥 먹다가 종종 말한다. "남들도 우리처럼 행복하게 살까?", "나는 참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말을 스스럼 없이 자주 하는지 신기하다. 정말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지극히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 남편은 너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누군가 물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 내가 삶을 좋아하게 만든 사람이자 나를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 나는 그로부터 실패와 행복이 어떻게 삶을 채우는지 배웠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얻는 해피엔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실패와 행복은 그저 함께 존재한다, 지겨움과 깨달음의 형태로. 인생을 채우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나니 더 살아보고 싶어졌다. 저 이상하고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인생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다. 또 다른 실패와 하찮은 행복을 향하여.


내일 오전 10시 tbn 대전교통방송에 남편의 목소리가 나온다. '아빠가 10년 후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낭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굳게 닫힌 녹음실 맞은 편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남편의 편지를 듣다가 눈물이 났다. 나의 이상하고 좋은 사람이 쓴 글을 옮겨 적는다.

안녕 귀염둥 혹은 예쁜둥, 사랑둥, 멋진둥. 요즘 너의 이름을 부를 때는 거의 없이, 애칭으로만 부르는 것 같구나.

네가 태어날 즈음인가, 아빠는 지금보다 마음이 더 무거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 아빠는 군대에 있었고 몇달만에야 너를 보러 나올 수 있었단다. 코로나가 한창 일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야. 롤리타를 감명깊게 읽고 어떤 글을 썼어.

"내 삶의 빛, 내 마음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우리 아가 태어난지 반평생만에 드디어 만났다. 꼼짝없이 아빠 없는 백일잔치를 예상했는데. 40여일만에 본 아들녀석은 아빠가 낯설었는지 졸렸는지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슬프지 않고 웃음만 나왔다. 목욕탕에서 글을 쓰다가 눈물이 터져나왔다. 내 삶의 빛, 나의 죄, 나의 우주야."

조금 감정 과잉인 것 같지만 지금 읽어도 솔직히 적은 글이야. 우주를 뜻하는 단어 '코스모스'는 아빠에게 특별한 단어야. 너도 알겠지만,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 네가 뱃속에 있을 때 너에게 많이 들려줬던 곡의 제목이야. 아빠가 너를 안고 신나게 랩을 하다가 갑자기 따라하지 못하고 멈출 때가 있을 거야. 그때는 주체할 수 없이 행복해서 눈물이 날때란다. 그 곡을 만든 사람은 자기 아들에게서 코스모스를 느꼈거든. 아빠도 마찬가지이고. 10년 후 너는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10년 뒤라니. 네가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쏘다니고, 속을 썩이고, 아빠를 멀리하고, 아빠의 말을 논리와 감정으로 논파하고, 그게 안되면 방 문을 걸어잠글, 그런 나이일 것 같구나. 네가 크는 것이 아쉽지만 아쉽지 않고 너는 언제나 귀엽고 사랑스러울 거야. 네가 어떤 모습과 마음이라도 아빠는 너를 사랑할 것이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거든.

아빠가 결혼을 하고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의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어.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누구의 아빠 엄마가 되는 것일까. 프로필과 담벼락에 자기 모습은 어디 가고 온통 자식으로만 도배해버릴까.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코스모스니까. 아이를 낳아보니 알겠어. '효도'는 헛된 말이야. 네가 태어나는 순간 빅뱅은 일어났고, 존재하는 것으로 엄마아빠의 삶은 팽창하거든. 나에게 우주를 보여줘서 고마워.

이제 짧은 편지를 마무리해보고자 해. 새해도, 그 다음 해에도,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가능하면 그 후에도, 네 말대로라면 3억년 후에도,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보자. 언제나 귀엽고 사랑스러울 나의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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