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장 얼 워렌(Earl Warren 1891-1974)
미국 연방대법원은 우리나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수행한다. 연방대법원은 대법관(justice) 9명으로 구성된다. 종신직이다.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면 후보자는 연방의회 상원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 대통령은 궐석 대법관을 지명할 때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궤를 같이 하는 후보를 지명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루스 긴즈버그(1933-2020) 후임으로 보수 성향의 에이미 베럿 판사를 후임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이 압도적인 우위(6 : 3)를 보이고 있다.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얼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워렌은 여느 대법관과는 경력과 결이 달랐다. 법률을 전공했지만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이었다. 대법관 임명 전 워렌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3번째 연임(1943-1953)하고 있었다. 최장수 주지사 기록이다.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공화당 소속의 아이젠하워(아이크) 대통령이 같은 공화당 소속의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것은 정치 노선에 의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보수 성향의 공화당 소속의 워렌 대법원장은 전혀 뜻밖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워렌은 대법원장으로 미국 인권 신장과 관련하여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 두 가지의 판결을 주도했다. 브라운 판결과 미란다 판결. 연방대법원은 1954년 "공립학교에서 분리된 교육시설은 위헌이다(separate educational facilities are inherently unequal)"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인종 간에 차별이 있더라도 분리하면 합법이라는 뿌리 깊고 해묵은 사고와 관행을 뒤집었다. 판결 이전 백인과 흑인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고, 식당, 극장, 화장실 등 모든 공공시설에서는 유색인과 백인을 구분했다. 심지어 영혼을 구제하는 교회에서도 흑백을 구분하는 커튼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수도꼭지도 백인과 유색인을 구분했다.
1966년 미란다 원칙(Miranda rule)을 판결했다. 미란다 원칙은 수사기관이 범죄 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의 이유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음을 미리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다(Miranda v. Arizona). 자기부죄(自己負罪 자기 스스로 범죄 책임을 묻는 것) 금지의 핵심 조항이다. 우리나라 역시 헌법 12조에 명문화하고 있다. 2항에는 '...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5항에는 '...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 7항에는 '피고인의 자백이 ...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 우리나라 경찰에서도 용의자를 체포할 때 미란다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워렌을 대법관으로 임명할 때만 해도 가장 공화당의 가치에 충실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가치를 대변한다." 대통령은 워렌을 잘 몰랐다. 아이크는 나중에 워렌 대법관 임명을 회고하면서 "이제까지 내가 내린 가장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라고 후회했다. 아이크는 후회막급이었겠지만 워렌이 대법원장(1953-1969)으로 있던 시기에 미국은 인권 신장을 이뤄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법관으로 정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워렌은 법을 공부했지만 정치인으로서 넓은 세상을 보았던 같다. 법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 대상이 유색인이든 범죄인이든 똑같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기본권이 있다. 오늘날에는 평범한 진리지만 당시 워렌의 인권 감수성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보수성향이 압도적으로 높아 미국 사회가 보수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다. 대법관의 정치적 이념과 자신의 신념 체계가 보수 성향이라고 해서 반드시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 같지는 않다.
연방대법원이 오바마 케어(Affordable Health Care)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도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오바마 케어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가입을 추진하는 것이다. 공화당 소속의 트럼프는 오바마 케어를 반대한다. 기업에 부담을 주고 선택의 자유를 뺏는다는 것이다. 대법관들은 미국 사회변혁의 키를 쥐고 있다. 제2, 3의 워렌 대법관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