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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한국의 궁궐 ③

5대 궁궐의 변천과 수난사

조선 개국 후 도읍지(수도)의 위치를 결정할 때 고려 요소가 있었다. 외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위치에 교통이 편리하고 식량과 물 공급이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입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전국의 명당 후보지들이 추천되었다. 한양의 무악, 북악을 비롯하여 경기도 장단군 백학산 일대, 도봉산 기슭 양주군, 계룡산 일대.  선 민심안정 후 천도를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성계는 천도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둘렀다. 고려 왕조의 터인 개성에서 빨리 벗어나 새 왕조에 맞는 새 도읍지를 건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계룡산 일대가 후보지로 급부상하여 이성계가 직접 답사를 다녀온 뒤 도읍터로 정하고 실제 10개월 동안 축성 공사를 했다. 이 계획은 도참 연구로 이름을 떨친 하륜의 반대 상소로 중지되었다. "산이 서북향으로 뻗쳤고 물은 동남방으로 빠져나가는 지세이므로 도읍터로 적당치 못하다." 하륜은 대안으로 무악 주산론을 들고 나왔다. 국가의 수도를 정하는 중대사를 얼마나 성급하게 결정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논란 끝에 한양으로 도읍지를 결정되었다. 한양을 도성으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갈렸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그 아래 정궁(법궁)을 세우고 낙산(駱山)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자고 주장했다. 무학 대사의 생각은 달랐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신생국 조선의 국사(國師)이기도 했다. 이성계는 숭유억불 정책을 국시로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승을 국사로 임명하였다. 지금의 대통령 자문위원장. 무학 대사와 이성계는 보통 사람의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섰다. 무학 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고 인왕산 아래에 정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 이념에 따라 한양 도성을 건설하려는 정도전과 신승(神僧) 무학대사의 대결에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다. 정도전은 유교적 질서에 따라 임금이 거처할 정궁은 남면(南面)하여 남쪽을 향해야 하는 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방향이 틀리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는 무학 대사의 주장을 따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유교적 통치 이념과 질서에서 보면 정도전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결정하자 개탄하면서 "나의 말을 좇지 아니하면 200년 후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으리라"는 예언을 남겼다. 예언은 예언일 뿐이고 200년은 먼 미래의 이야기다. 도성의 위치가 결정되면서 창건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1395년 조선 왕조의 정궁이자 상징인 경복궁이 창건되었다. 이후 차례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완성되었다.       


1592년 임진년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했으니 무학 대사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신승의 예지력은 놀라웠다. 경복궁은 성난 민초에 의해 소실되었다. 야밤에 몽진하는 임금과 위정자를 본 민초들은 궁궐에 불을 질러서라도 좌절, 배신, 분노를 표현했다. 임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종전 후 선조는 한양으로 환도하는 데 갈 곳이 없었다. 월산대군(세조 손자)의 사가와 인근 민가를 헐어 행궁을 마련하였다. 이곳을 경운궁(훗날 덕수궁)으로 승격하였다. 광해군은 경덕궁(훗날 경희궁)을 짓던 중 인조 반정으로 쫓겨났다. 5대 궁궐의 수난사를 쫓아가 보자.


1395년 창건된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소실되기 전 경복궁은 정궁이었지만 홀대를 받았다.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 천도하면서 창건한 창덕궁에서 정사를 봤다. 경복궁에서 형제들과 정적들을 죽이느라 피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기피했다. 불타 버린 경복궁은 1867년 고종대에 와서 중건되었다. 무려 275년 동안 방치하였다. 역대 왕조는 중건을 위한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것인지 궁금한 일이다.     


일제의 경복궁 흔적 지우기는 악랄하고 집요했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 왕조의 법궁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훼철하기 시작했다. 1915년 많은 전각을 헐고 민간에 건자재를 팔아넘겼으며, 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건청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세웠다. 1915년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기로 확정하고 흥례문 권역을 헐고 이듬해부터 공사에 들어가 1927년 준공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화문이 헐려 동북쪽 담장으로 이전되었다. 광화문은 1968년 복원되었다. 1917년 창덕궁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자 이를 복구한다며 강녕전과 교태전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겼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정부청사로 사용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에서 철거되었다.  

  

1405년 창건된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약 200년 동안 왕조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10년 왜란으로 소실된 궁궐 중 가장 먼저 중건되었다가 1623년 인종 반정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1647년 창덕궁은 다시 중건되어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다. 창덕궁 비원으로 불리는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일제는 창덕궁의 후원만 강조하여 관리소 이름을 비원청(祕苑廳)이라고 했다. 창덕궁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치 않다. 창덕궁의 정원은 후원, 금원과 함께 비원이라고 불렀으니 ‘창덕궁 비원’이라는 표현은 가능하다. 창덕궁은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상왕 전)을 성종대에 리모델링하고 확장한 것이다. 담을 두고 창덕궁과 나란히 있어 있다고 하여 동궐이라 불렸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 광해군이 중건했다. 다시 이괄의 난 때 소실, 중건된 이후에도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다. 1909년 일제는 동궐에서 창경궁을 분리하여 동물원, 식물원으로 만들고 창경원이라 바꾸었다. 궁이 원으로 바뀌고 창경원은 관광과 소풍 장소가 되었다. 1983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창경궁 이름을 되찾았다.  

    

경희궁은 광해군 1623년 중건되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元宗 1580-1620 인조의 아버지이면서 왕세자를 지내지 않고 왕으로 추존됨)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 영조가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1910년 일제는 궁궐의 일부를 헐어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 서울고등학교)를 세웠다.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경희궁은 3대 궁궐 중 하나지만 훼철 정도가 가장 심했다. 궁터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교육청, 축구협회, 구세군회관 자리를 포함할 정도였다. 1980년 서울고가 강남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일부가 복구되었다.      


1593년 선조는 피난지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도하였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갈 곳이 없었다.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시어소(時御所 임금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다. 1611년 광해군은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1618년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서궁'으로 낮춰 불렀다. 덕수궁은 고종이 일제의 침탈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으로서 위상을 되찾으려는 수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고종은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아관파천이다. 신변의 안전 문제가 해결된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덕수궁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된다. 1904년 덕수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많은 건물이 소실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망국의 한을 간직한 곳이기도 한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덕수궁은 정릉동 행궁-경운궁-서궁-경운궁-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는 복잡한 변천사를 겪었다.     


5대 궁궐은 조선 건국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 난, 화재 등의 원인으로 파괴, 훼철, 소실되는 수난과 변천을 겪었다. 특히 일제에 의한 조선 왕가 전통 지우기는 그 행동과 방법이 악랄하고 교묘한 민족정기 말살 정책이었다. 궁궐은 조선 500년, 일제 강점기, 광복, 6.25 전쟁,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다. 궁궐의 수난은 곧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지만 지켜나가야 할 역사의 터전이다.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의 역사가 스며든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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