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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아편전쟁 ①

서구 열강의 추악한 욕망

인간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 간의 교류는 무역의 형태로 나타난다. 19세기 중화를 자임한 중국에서는 ‘중국에는 외국과의 교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있다’라는 교만으로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능한 외국과의 소극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하다 마지못해 남쪽 광저우를 개항하고 13행을 설치한다. 13행은 13개 상단을 말하는 데 서양인은 이들 상단 하고만 무역거래를 하게 했다.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큰 형님으로 조공을 받고 있던 중국은 서양 국가들도 하나의 조공국으로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주력 상품은 차(茶), 도자기, 비단 등이고, 유럽 국가들은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했다. 문제는 유럽 국가들의 무역적자가 심각했다. 유럽인들은 중국산 제품에 매료되어 수입을 많이 하다 보니 천문학적인 대중국 무역적자를 보았다. 차 수입은 25,000%가 증가했고 유럽에 차문화가 형성될 정도였다. 특히 중국에서는 무역결제를 은(銀)으로 했는데, 중국은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급부상하였다. 주로 은은 스페인 통치국인 남아메리카와 일본에서 생산되었는데 대부분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문명국을 자처하고 동양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던 유럽인들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영국은 ‘해가지지 않은 국가’로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 산업혁명으로 국내 경제는 고도성장을 하고 국제적으로는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인도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을 식민 통치하는 등 모든 것이 섬나라 영국으로 통했다. 그런 영국이 대중국 무역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아편(opium)이다. 인도에서 대량 생산된 아편은 매년 1,800톤을 중국에 수출하였고 엄청난 인구를 중독시켰다. 처음에는 아편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파이프는 덤으로 제공했다. 중국인들(아편전쟁 100년 전부터 아편 금연금지 정책을 폄)은 아편을 약제로 사용한다던지 일부 계층에서 기호품으로 애용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모든 계층에 아편이 보급되면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등장하였다. PC방과 같은 아편굴도 성업했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인구 4억 중 10분의 1 정도가 아편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아편 수입에 따른 무역대금(국고수입 4천만 냥 중 3천만 냥)을 지불하느라 중국에는 그 많던 은이 부족하게 되었다. 유럽은 차에 중독되고, 중국은 아편에 중독되었다. 


아편이 몰고 온 사회적, 경제적 부작용의 심각성을 인지한 중국 왕조는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왕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권을 가진 임시직)으로 임명하고 광동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영화 ‘아편전쟁’(1997년)은 임칙서의 활약과 아편전쟁의 이모저모를 다루고 있다. 임칙서가 몰수한 아편은 2만 2천 상자가 넘었고 소각하는 데만 23일 걸렸다. 아편을 석회와 소금을 섞어 중화시킨 다음 바다로 버렸다. 바닷물에서 아편이 화학적 작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미 제국주의의 위세에 눌려 중화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중국과 제국주의에게 임칙서의 행동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인들에겐 민족의 기상을 드높인 영웅적인 행동이었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에겐 중국을 강제로 개방하여 무역거래를 할 수 있는 호기로 작용했다. 


광주에 거주하는 영국 상인들은 영국 정부의 재산을 소각하고 상인들의 생명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출병을 요청한다. 중화의 중국과 유럽을 대표하는 영국 간에 ‘중. 영 전쟁’이 발발했지만, 한 마디로 중국은 영국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차이는 대포의 사정거리였다. 중국의 대포는 명나라 때 사용하던 홍이포(17세기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대포)로서 해안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해군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영국의 대포는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했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도 이 전쟁의 승인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전쟁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임칙서는 아편의 문제를 도덕적인 경각심으로 해결하고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폐하의 상인들은 폐하의 나라에서는 불법인 독극물인 아편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보며, 만약에 허락하셨다면 군주로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물론 이 편지는 전쟁이 발발한 뒤에 여왕에게 도착했지만, 설사 전쟁 전에 편지를 받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제국주의의 욕망을 채우는 거대한 시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억 중국인의 셔츠가 1인치만 늘어나도 영국의 공장을 30년 가동할 수 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슈퍼 파워 국가다. 지금이야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과 경쟁을 하고 있지만, 18세기만에는 지구 상의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해가 뜨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영원한 슈퍼 파워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로마제국, 대영제국, 중화 중국에서 이미 목격하였다. 19세기 유럽과 중화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는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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