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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아편전쟁 ②

조선과 일본의 대응

1839년 영국이 무역 거래의 보호라는 미명 아래 촉발시킨 아편전쟁은 1차(1839-1842)와 2차(1856-1860)에 걸쳐 전개되었다. 1차 전쟁은 아시아의 대표 중국과 유럽의 대표 영국 간의 '중. 영 전쟁'이었다면, 2차 전쟁은 중국 단일팀 대 유럽 혼합팀(영국, 프랑스) 간의 대결이었다. (단일팀, 혼합팀이라고 쓴 이유가 있다. 16세기만 해도 중국의 GDP는 전체 유럽의 GDP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유럽의 단일팀 하고 겨루어도 맥을 추지 못했는데, 혼합팀과의 대결은 해보나 마나였다.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전쟁이지만 그 결과는 중국과 중국인에게  참혹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열강들은 홍콩을 떼어가고 강제적으로 주요 항구를 개방시키고 심지어 아편무역을 합법화시키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하늘보다 높았던 중화(中華) 의식의 민낯이 만천하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주변국의 조공을 받으며 황제 또는 큰 형님 대접을 받았던 중국의 완패에 대해 주변 조공국이 느낀 충격은 훨씬 더 컸다. 이제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큰 형님이 정말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던가?    

 

아편 전쟁 이후의 조선과 일본의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역지사지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탐색이 될 수 있다. VUCA 시대에 국가 통치의 지향점을 어떻게 설정하고 국정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국경을 개방하고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근대화 노선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문을 걸어 잠그고 서구의 노크를 무시한 채 자신만의 독자 노선을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조선은 아편전쟁의 결과를 놓고 어떤 분석을 내리고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의 외교는 곧 중국 사대외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대외교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사대외교는 이웃 강대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고도의 통치 전략일 수 있다. 반면에 지나친 사대 외교는 주권 국가로서 권리 행사에 제한이 생기고 자칫 내정 간섭의 빌미를 제공한다. 아편전쟁의 결과를 전해 들은 조선은 충격과 당혹감 속에서도 냉정을 되찾았다. 물론 중국의 패배가 믿기지 않았고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론은 초지일관 중국 바라보기다. 중화의 원조 중국이 대중화(大中華)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조선이라도 소중화(小中華)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고 나섰다. 변함없이 조선의 해는 중국에서 뜨고 중국으로 졌다.  

    

특히 청나라 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유교, 문화, 예술, 과학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용후생과 실사구시를 추구하고자 했던 지식인들, 즉 북학파(北學派)에게 충격은 더 컸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와 반면 명나라를 몰아내고 왕조를 교체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오랑캐 국가로 부르고 그 존재에 반감을 갖고 있던 유림에서는 자신들의 판단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웃 일본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아편전쟁 이전부터 일본은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건설하고 외국인 거류지를 조성하여 서구와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와 교역이 활발하여 네덜란드학을 의미하는 난학(蘭學)의 열풍이 불 정도였다. 무엇보다 일본은 외국 선교사와 상인들로 통해 아편전쟁의 결과를 조선보다 먼저 알았다. 19세기 일본은 국제적으로 정보수집에서 선두주자였다. 무엇보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란 호랑이의 이빨이 빠진 것을 알고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했다. 대신 서양의 신문물과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국가개조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게 된다. 유럽(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각국과 미국에 수 백 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여 유럽의 신문물을 배워오게 한다. 이들 유학생 중에는 한반도 식민지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편전쟁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촉발시킨 근인이 되었다.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일본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유럽 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맺고 각국의 장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대규모 사절단을 구미 각국에 파견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선박 제조와 운영 기술과 같은 조선해양기술을, 독일로부터는 군사기술을, 네덜란드에서는 의학을 배웠다. 물론 일본이 다양한 분야에서 서구 선진문물의 수용하면서 쌓은 국력은 군국주의 노선을 채택하는 동력이 되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견인했다.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에는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이 넘쳐나 타국과의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던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갈기갈기 난도질을 당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허장성세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중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서도 조선은 소중화를 자임하고 중국과의 의리를 국정의 우선순위로 삼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반면 일본은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실속을 챙기는 의사결정을 통해 국가개조를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욕망이 분출되고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때 조선과 일본의 대응은 20세기 초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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