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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표류기 ②

홍어장수 문순득의 경우

해상에서 표류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해난사고다. 표류는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나 본래 목적지를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삼면이 바다인 조선에서도 해난사고가 많았다. 주로 해안가에 거주하는 어민들이 어로 중에 사고를 당하지만, 여행이나 상업 활동 중에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훈(2003)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인이 일본에 표착한 사례만도 천 건이 넘고 1만여 명의 조난객이 발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인만 해도 연간 26명, 한 달 평균 2명 정도이니 중국과 일본을 포함시키면 더 복잡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조난객의 처리는 국가 간의 중요한 외교 문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표류 사건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아니다. 표류민의 대부분은 글을 제대로 익힌 식자층이 아닌 이유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길 소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 표류 역사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특별한 사례가 있다. 우이도(현 전남 신안군)에 살던 문순득(文順得 1777-1847)이란 상인이 일행 5명과 함께 홍어를 구하러 흑산도 인근으로 출항했다 풍랑으로 표류를 하게 되었다. 그는 흑산도 홍어를 사서 영산포에 팔고 다시 쌀 등 육지 물건을 구입하는 중개 무역상이었다.  


문순득의 표류와 외국 체험은 3년 2개월(1801년 12월-1805년 1월 8일)에 걸친 조선인의 오딧세이다. 그의 표류 노정과 함께 당시 국가 간의 표착민의 송환 체제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의 표류 경험담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첫 표류국은 유구(琉球 현 오키나와현과 가고시마현)이다. 일행은 6개월 정도를 이곳에서 체류하다 중국 복건성으로 송환된다. 의문이 생긴다. 유구는 왜 조선인을 조선에 송환하지 않고 중국으로 보낼까? 유구와 조선은 외교 관계를 맺은 상태이고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교류가 활발했다. 1609년 유구가 일본에 복속된 후만 해도 유구 표착 조선인은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치는 송환 절차(유구-나가사키-대마도-조선)를 따랐다. 이 절차는 1696년에 바뀌게 된다(유구-중국 복주-북경-심양-광주-조선 의주). 바뀐 이유 중 하나는 유구와 일본과의 관계에 있다.      


1684년 중국이 해금령을 철폐하면서 중국 상선들이 나가사키항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유구 표착 조선인들이 나가사키로 옮겨지는 것을 중국이 알게 되면 중국의 조공국인 유구가 일본의 속국이 된 것에 대해 불편한 반응을 보일 것을 염려하였다. 유구도 일본을 통하지 않고 표류인을 바로 중국으로 송환했을 때의 외교적, 상업적 실익을 노렸다. 표류선, 호송선에 실린 화물에 대해서는 청나라가 면세혜택을 부여했다. 조선은 중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저자세의 외교를 하는 일본과 유구 사이에서 표류민의 송환 절차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대한해협이란 지름길을 놔두고 돌고 돌았다.   

    

1802년 10월 7일 유구에 체류 중인 중국 표류인, 호송 책임을 맡은 유구인, 조선 표류인이 호송선에 탑승했고 진공선(유구의 해상 무역을 위해 중국에서 정책적으로 제공한 무역선) 2대도 함께 출항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섞여 있었다. 이 배들이 또 표류하여 여송(呂宋 현 필리핀 루손)에 표착하였다.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째 표류국이다. 사람들뿐 아니라 무역선까지 표류하게 되면서 유구와 중국 간에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 되었다. 당시 여송은 스페인 식민지였고 유구나 조선과는 외교관계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외교관계가 없는 표착지 여송에서 체류비 부담을 누가 지불하느냐이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호송 책임국에서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유구 호송인과 함께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는 유구의 책임이었다. 본래 목적지(중국 복건성)가 아닌 엉뚱한 곳에 표착한 뒤 호송 책임을 맡은 유구인과 중국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현지 체류 비용 지불 책임이 있는 유구인들은 빨리 출발하자고 주장하고, 중국인들은 바람을 기다렸다 천천히 가자는 주장을 했다. 자기 돈 쓰지 않으니 만만디 근성이 발동한 것일까. 결국 유구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에서 문순득과 일행 1명은 여송에 남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발생하는 체류 비용은 자비로 부담해야 했는데, 화교들의 도움과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국가 간의 외교 관계 유무에 따라 표류민의 보호 책임도 갈렸다.      


1803년 8월 문순득은 여송에서 상선을 타고 오문(澳門 현 마카오)에 도착했다. 세 번째 표착국 오문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이곳에서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포르투갈은 조선과 외교관계는 없지만 포르투갈은 중국에 표류민을 보고하고 중국에서는 조선의 표류민에 대한 보호를 요청했다. 포르투갈과 조선의 직접적인 외교관계는 아니지만 제3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한 송환 체제가 작동하였다. 본래 중국에서는 오문에서 바로 조선으로 보내도록 했지만, 조선으로 왕래하는 무역선이 없었다. 문순득은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북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1804년 5월 북경 도착).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중국에서 부담했다. 북경에 도착했을 때 중국은 조선 왕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조선에서 온 사신이 있으면 귀국길에 동행하게 하여 송환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1804년 11월 문순득은 조선 사절단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홍어 장수 문순득의 해상 오딧세이는 흥미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여곡절도 많지만 이 표류기를 통해 당시 국제정세는 물론 외국 표류민에 대한 송환 절차와 체제를 알 수 있다. 표류민이 도착한 국가에서 체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국가마다 표류민에 대해 어떤 수준에서 예우할 것인가에 대한 매뉴얼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조선 표류민에 대해 땔감, 쌀, 무명옷 1벌, 가죽신 1켤레를 지급한다. 유구에서는 매일 쌀 한 되 다섯 홉과 채소를 주고 하루 걸러 돼지고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 국가 간 외교 관계에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이 표류 경험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문순득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 중인 정약전(1758-1816)을 만나게 된다. 홍어 장수와 실학자의 만남이다. 한 사람은 실무에 밝은 상인이고 또 한 사람은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이론에 밝은 실학자다. 화학적 결합이 잘 맞았을 것이다. 문순득의 인크레더블한 오딧세이 경험담을 들은 정약전은 그의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로 엮어냈다. 오딧세이의 시작과 끝.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호를 지어준다. "세상에서 이런 경험을 한 것은 당신이 처음"이라는 의미이다. <표해시말>은 곧 천초록(天初錄)이다. 


아직까지 <표해시말>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손암 정약전(1756-1816)의 동생이면서 당시 강진에서 유배 중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등장한다. 형제의 우애는 특별했다. 유배길도 함께 했다. 나주까지 함께 왔다 형은 우이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갔다. 다산은 손암을 인간적, 학문적으로 존경했다. 형제의 교류에 대해 따로 글을 써봄 직도 하다. 맑은 날 해남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두륜산 정상 두륜봉에서 보면 우이도가 보인다. 다산은 형이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할 때는 두륜봉에 올라 우이도를 보면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곤 했다.     

다산은 유배 중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중 이강회(1789-?)가 손암 사후 우이도에 칩거하면서 스승 정약용과 정약전의 글을 한데 묶어 <유암총서>를 발간(1818년-1819년 사이)했다. 다산은 손암에게 편지를 종종 부쳤는데 이 내용 중에는 제자들이 쓴 시문도 보내 피드백을 받곤 했다. 심지어 자신이 쓴 책 내용도 형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했다. 이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를 넘어 학문적 동반자요 동생의 제자는 곧 형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 총서에 바로 <표해시말>이 실려있다. 기이한 일이다. 정약전이 저술한 원본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1979년 발견된 <유암총서>에 <표해시말>에 담겨 있었다. <표해시말>은 문순득-정약전-정약용-이강회 4명의 콤비가 만들어낸 해양 문화사의 역작이다.      


문순득의 표류 경험도 중요하지만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손뼉도 양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사람도 만나야 한다. 또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역사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끼어들 공간은 있다. 우연이 쌓이면 필연이 되고 그것은 관계에서 생성된다.      


P.S. 조선왕조실록(순조 9년 1809년)에 문순득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제주도에 표착한 표류민 처리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문순득이 제주도로 파견되어 이들을 여송으로 송환하는 데 기여했다. 문순득은 여송에 체류하는 동안 지역 토착어를 익혀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했다. 흑산도 홍어 장수의 다부진 실력이다.  실록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 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표해시말> 3부에는 문순득이 조선어, 유구어, 여송어를 비교한 내용이 등장한다. 자주 쓰이는 일상 단어 112개다. 그는 지적 호기심도 많았고 상당히 낙천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어느 곳에서든 잘 적응하고 소통이 가능한 글로벌 인재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이종찬(2016). 열대의 서구, 조선의 열대. 서강대학교출판부.

이훈(2003). 조선인의 표류와 기록물. 솔.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2권.

최성환(2012). 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노정과 송환체계. 한국민족문화 43권. 189-233.

최성환(2013).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표해시말. 국가기록원 2013년 봄호. 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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