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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pr 06. 2022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

점은 과거와 미래의 징검다리다.

저자는 허우대만 멀쩡한 약체였다. 형제들은 막내로 태어나 모유를 충분히 먹지 못해 약하다고 위로했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싶다. 특히 호흡기가 약해 환절기에는 제일 먼저 감기에 걸렸고 조금이라도 과로하면 몸살을 끼고 살았다. 2016년 겨울에는 2월부터 4월 중순까지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이물질이 걸려있는 느낌이었다. 어린이들이 주로 걸리는 백일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낮에는 견딜만한데 저녁에는 기침을 몰아서 해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침에 좋다는 배즙, 생강청, 무 꿀즙, 도라지액, 파뿌리차를 참 많이도 복용하고 마셨다.


몸을 리모델링할 계기가 찾아왔다. 2018년 3월 직장에서 마라톤대회에 단체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저자도 10km에 도전장을 냈다. 달리기를 꾸준히 해 온 사람은 10km는 가볍게 뛸 수 있지만 초보자는 5km도 벅차다. 50대 후반이지만 마음은 젊은이 못지않았고 학교 운동장, 경복궁 담장길, 인왕산 자락길에서 틈나는 대로 연습을 했다. 초보자답게 무리를 했고 대회가 임박했을 때는 무릎 통증이 찾아왔다. 진즉 송파 올림픽공원에서 출발한 마라톤에서는 1km 지점에서 멈추고 목적지까지 걸었다. 병원에서는 앞으로 달리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달리기를 하고 땀을 흘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도 상쾌했다. 무엇보다 달리기를 하고 난 뒤부터 단골손님이었던 감기가 걸리지 않았다. 면역력이 강화된 느낌이었고 활동이 과해 몸살 기운이 있어도 회복 속도가 빨랐다. 이왕 시작했으니 의사의 말을 참고하면서 천천히 달리면서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체중을 줄여 무릎에 부담을 줄이고 근육을 키우면서 달리기에 맞는 몸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달리기 노트에 달린 거리와 몸상태를 기록하면서 누적 거리를 계산하는 재미를 붙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달리기에 대한 철학적 의미와 달려야 하는 이유도 마음에 새겼다. 


그렇게 2017년부터 시작한 달리기는 생활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이 저자의 건강을 지키는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평균 두 번을 달리고 한 번에 7~8km를 달린다고 치면 월간 여덟 번, 연간 100회를 달리는 셈이다. 연간 누적거리로 따지면 700~80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고 남는 거리다. 달리기는 저자의 면역체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난 5년 동안 딱 한 번 감기에 걸렸고 금세 회복되었다. 저자의 건강은 달리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면역력에 관한 한 과거의 내가 아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겪었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2020년 1월 여수마라톤대회 하프에 참가했다. 꾸준히 연습을 했고 다리에 잔근육이 어느 정도 생겼다고 판단하고 하프에 도전하였다. 하프는 마라톤 풀코스의 절반인 21.0975km를 달린다. 여수 EXPO 박람회장을 출발하여 오동도, 돌산대교, 만성리 해수욕장을 돌아오는 코스였다. 15km 지점인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풀렸고 팔 저을 힘도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졌다. 그대로 바닥에 눕고 싶었다. 함께 뛴 건각들은 앞서 가버리고 뒤에는 몇 사람 보이지 않았다. 여수의 매서운 바다 바람은 땀을 식혔고 체온이 떨어지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길 옆으로 이동하여 서서히 걸으면서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주변의 건각들은 허리춤 벨트에서 간단한 에너자이저를 꺼내먹곤 했다. 그동안 혼자 동네에서 달렸던 저자는 몸과 마음만 앞섰지 장거리에 필요한 비상식품을 챙길 줄 몰랐다. 뭔가 먹거나 마시면서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거의 꼴찌로 간식대에 도착한 저자의 몫은 없었다. 앞에서 흘린 초코파이 가루만 보였다. 봉사하는 학생이 바닥을 손으로 훔쳐 초콜릿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친절과 배려였다. 10km와 하프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무조건 달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달리기를 더 겸손하게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은 옆길로 밀어놓고 달리기를 우리의 삶에 연결시켜보자. 천리길도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달리기도 한 발을 앞으로 내미면서 시작한다. 주자(走者)가 앞으로 내민 한 발자국은 한 점이고 그 점들이 모이면 선이 된다. 달리기의 점(點)에 대해 말하자면 2005년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의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을 떠올리게 된다. 잡스는 사회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점들의 연결(connecting the dots)'에 대해 연설했다. 잡스의 연설 중 해당 대목을 음미해보자.


물론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미래를 보고 점들을 연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되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러분은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점들이 여러분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짱, 운명, 삶, 업보 등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의 미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점들이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왜 위와 같은 연설을 했을까? 그가 경험했던 특별한 과거의 점이 있었을 것이다. 잡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소재 리드 칼리지(Reed college)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인문학과 과학 중심 교육으로 명성이 높다. 잡스는 대학에서 서체(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서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10년 후 그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를 구상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매킨토시는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만약 잡스가 대학에서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PC는 아름다운 글씨체를 가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잡스에게 과거의 특별한 점(點)은 서체 강의를 들었던 경험이었다. 잡스는 인간이 겪은 어느 시기의 경험이 점이라면 그 점들이 모여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년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맞는 말이다.


달리기의 점이 잡스의 점과 연결되면서 묘한 시너지 효과를 나타낸다. 과거의 점, 그것이 고생이든 실수든 인연이든 인간의 미래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 달리기 역시 한 점 한 점이 모여 선이 되고 그 선들이 모여 5km, 10km, 하프, 풀코스가 된다. 달리기 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라. 그는 마치 누에나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이 점을 이어 선으로 이어나간다. 그가 뽑아낸 실을 모으면 수많은 옷을 짓고도 남을 정도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1949~)를 작가로서 보다는 달리기 마니아로 더 좋아한다. 하루키는 평생을 달린 마라토너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이틀에 걸쳐 100km를 달린 적도 있다. 그가 작가로서 롱런할 수 있는 비결도 달리기와 관련이 있을 성싶다. 그의 달리기에 관한 어록은 강렬하다.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어쩌다 달리기를 하면 몸은 무겁고 근력은 어느새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근육은 정직하여 노력한 만큼 보상을 돌려준다. 타협도 하지 않고 융통성도 부리지 않는다고 하니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은 없다는 교훈이다.


저자가 애송하는 시 중에 에드가 A. 게스트(Edgar A. Guest 1881-1959)의 〈결실과 장미〉의 구절을 음미해보자.


크건 작건간에,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자 하는 이는

허리를 굽혀서 땅을 파야만 한다.


소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극히 적은 까닭에

우리가 원하는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일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비밀이 여기 쉬고 있기에

당신은 끊임없이 흙을 파야 한다.

결실이나 장미를 얻기 위해선.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땀 흘려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다. 달리기를 하려면 근육이 탄탄해야 하고 그 근육은 꾸준히 관심을 받을 때에 근육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근육은 타협할 대상도 아니고 융통성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정원에 심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 흙을 파야 하듯이 계속 달리려면 쉬지 않고 근육을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 오히려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달리면서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세 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 무릎은 침묵하면서 그 충격을 견뎌내고 있다. 물론 인간의 뼈는 하중을 받아야 강해진다고 하지만 하중의 임계치가 넘으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러너에게는 무릎이 침묵할 때가 좋을 때다. 그러나 침묵한다고 해서 마구 사용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침묵을 깨뜨리지 않도록 소중히 다뤄야 한다. 말 없는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이치와 같다.


바둑 마니아인 저자가 달리기를 바둑과 비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둑 역시 한 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달리기와 닮았다. 달리기의 한 점 한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이 선들이 수십 미터, 수십 킬로로 집계되는 것처럼, 바둑 역시 가로 세로 열아홉 줄에 놓인 점들을 연결하여 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서봉수 명인은 바둑이란 "점을 이어 선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정의 내린다. 대체나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이면 냇물이 되고 바닷물에 이르는 것처럼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것이다. 점 하나는 과거에 묻힌 것 같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의 인생에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된다. 스티브 잡스가 서체 공부에서 얻은 영감으로 컴퓨터에서 아름다운 서체를 구현한 것에 보듯이 과거의 한 점은 현재와 연결되고 미래를 결정짓는 힘이다. 달리면서 바둑을 복기하고 인생을 복기하고 건강을 리모델링하니 일석삼조다.   


무라카미 하루키. (201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류시화. (2006).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열림원.

잢, 스티브. (2005).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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