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Apr 11. 2023

호남 3대 명촌 2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院村) 마을 사례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 마을은 칠보산(해발 469m)과 성황산(해발 125m) 사이에 위치하며 필수(泌水, 지금의 칠보천)와 고운천(孤雲川)이 마을을 안팎으로 감싸며 동진강으로 흐른다. 안산(案山) 즉,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과 물의 기운이 마을을 보호하고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지형이다. 건국대 조용헌 석좌교수는 원촌에서 물이 흐르는 방향이 서출동류(西出東流), 즉 서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똥물도 약이 될 만큼' 좋은 물로 본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물이 있을까 싶다. 원촌은 풍수지리적으로 탁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호남의 명촌으로 꼽히는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과 마찬가지로 원촌 마을 역시 서원과 사당이 많다. 지역의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교화하는데 앞장섰다는 뜻이다. 전통사회에서 한 두 개의 서원이 있는 마을이야 많겠지만, 원촌 마을은 ‘무성서원’ 등 큰 서원과 사당이 있어 ‘원촌’이라 불린다. 마을 이름이 서원이 있는 마을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마을의 정체성을 서원으로 정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촌 마을 뒤 성황산올라 마을을 바라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을 중심으로 좌우와 중앙 방면으로 마을을 형성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마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무성서원은 다른 지역의 서원과는 위치와 기능에서 차별화되었다. 무성서원은 원촌 마을을 호남의 명촌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 차별화되는 세 가지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서원의 위치다. 대부분의 서원은 마을에서 떨어진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무성서원은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서원이 주민 생활의 중심이고 접근성이 좋은 주민 친화적이다. 지역 지식인들이 지역민과 함께 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미다. 둘째, 서원은 지역주민이 뛰어난 인물이 태어난 지역 또는 그의 묘소가 있는 지역에 입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무성서원은 그렇지 않았다. 무성서원의 유래는 특별했다. 이곳 지역주민들은 신라 시대 최지원(857~?)과 조선 시대 신숙주의 증손자 되는 신잠(1491~1554)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을 주민들이 생사당(生祀堂)을 지어 그들의 공덕을 기렸다. 생사당은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1696년 숙종이 두 개의 생사당을 합쳐 무성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왕이 현판을 하사한 사액(賜額) 서원이다. 서원을 세울 때의 콘셉트가 다르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에서 임명한 군수급의 고위 공무원이 마을을 잘 다스려 마을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자발적으로 지은 두 개의 기념관이 서원이 된 것이다. 대개는 지역에 영향을 크게 미친 인물이 죽은 다음에 그를 추앙하는 사당을 짓거나 배향 의식을 거행하는 데 이 마을은 임명직 관리를 잘 만났다. 셋째, 무성서원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항일(抗日) 운동의 본산지가 되었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본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켜 창의(倡義) 격문을 선포했다. “아~ 어느 시대인들 난적의 변고가 없겠느냐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었겠느냐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켜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낫지 않겠는가?”  무성서원 마당에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記蹟碑)가 남아 의병들의 결기와 함성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무성서원은 위치, 생사당에서 서원으로 변천 과정, 항일 의병의 거병소 등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다른 서원과 차별된다.

   

2019년 무성서원은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재되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받았다. 다른 8개 서원(위치/주향 인물)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경북 영주/안향), 안동서원(경북 안동/이황), 병산서원(경북 안동/류성룡), 옥산서원(경북 경주/이언적), 도동서원(경북 달성/김굉필), 남계서원(경남 함양/정여창), 돈암서원(충남 논산/김장생), 필암서원(전남 장성/김인후)이다. 서원의 주향 인물을 보면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유학의 대가들이다.


원촌 마을 입구에 세워진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의 안성열 관장이 저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9개 서원의 공통점에 대해 알고 있느냐?" 저자는 향촌의 교화니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 등 몇 가지를 대답한 것 같다. 관장님 대답은 간단했다. "모두 사적으로 등록된 서원이다." 우리나라의 그 많은 서원 가운데 어떤 서원을 등재할 것인가는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등재 신청 기준은 바로 사적(史蹟)으로 지정받았느냐의 여부였다. 서원과 같은 유형문화재는 대개 지방문화재 등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사적은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문화재를 말하는데, 유형 문화재는 가치 정도에 따라서 국보, 보물, 사적, 지방 문화재 따위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를 보면 서원의 본질적인 기능 외에도 국가재정 낭비와 당쟁의 소굴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이 노비를 점유하고 면세, 면역의 특전을 누리면서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고 정치적 분란을 만든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산재한 수백 개의 서원이 철폐 또는 훼철되고 47개 서원만이 남겨졌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670여 개의 서원이 남아있는데, 철폐 또는 소실된 서원을 후손이나 후학들이 다시 중건한 것이다.


칠보면 원촌 마을이 호남 명촌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좋은 풍수의 생태적 환경과 서원의 역할도 있지만 향약의 보급과 실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古縣洞鄕約, 보물 1181호)은 조선 최초의 민간 향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현’은 ‘칠보’의 옛 지명이다. 고현동 향약은 정극인(1401~1481)이 1475년 처음으로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을 정리한 것으로 퇴계의 예안향약(1556년)과 율곡의 서원향약(1571년)보다 81년이나 앞섰다고 한다. 15~16세기의 향약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선조 35년(1602)부터 1977년까지의 자료가 보존됐다. 향약은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로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으로도 부르는데, 대개 덕업상권, 예속상규, 과실상규, 환난상휼 등 4대 실천 강목을 강조하면서 지방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는 약속의 의미이며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학기 위한 규약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상부상조의 정신에 유교적 가치를 더한 것이다. 향약이 주민의 교화를 주목적으로 한다면, 계는 친목과 상부상조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이자 하층민 통제수단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 지방자치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호남 3대 명촌으로 평가받았던 나주 금안동, 영암 구림마을, 정읍 원촌 마을은 공통적으로 동계를 가지고 있었다. 금안동의 「금안동계」, 태인의 「고현동약」, 구림마을의 「구림대동계」가 그것이다. 예컨대, 나주 금안동에는 후손들 즉, 나주 정 씨(羅州鄭氏), 하동 정 씨(河東鄭氏), 풍산 홍 씨(豊山洪氏), 서흥 김 씨(瑞興金氏) 등 4 성씨가 주축이 된  ‘4성계(四姓契)’와 ‘대동계(大同契)’가 마을의 중요한 일을 주관했다. 동계는 마을 공동 재산의 유지, 관리 및 노약자에 대한 경제적 배려, 구황식물의 구비 등 마을 전체의 일을 운영해 나간 공동체였다. 마을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구심점으로서 동계가 있음으로써 그렇지 않은 마을보다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단합이 원만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호남 3대 명촌으로서 원촌 마을만의 차별화된 요소가 있을까. (굳이 여기서 명촌의 조건을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풍수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고, 인재가 배출되는 지역이면 명촌의 반열에 들어간다.) 저자는 원촌 마을에서 다른 명촌과 차별화된 두 가지 요소를 발견했다. 첫째는 다른 마을과 달리 서원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여 마을의 구심점이 되었다. 주민친화적인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의 지식인들이 지역민과 함께 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의미다. 무지렁이 백성을 교화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모여 명촌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는 후손들의 노력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문화해설사가 안내를 해주고 사료관에 가면 관장이 원촌 마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선조들이 쌓아온 역사를 잊지 않고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아름답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라고 한다. 원촌 마을이 명촌으로서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하는 이유를 찾았다.


칠보천을 가로질러 내장산 IC를 빠져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신숙주는 나주 금안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신장(申檣)은 향약 자치규약인 금안동계를 조직하고 향촌을 발전시켜 금안동을 호남의 명촌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신숙주의 증손자 신잠은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꽃처럼 섬기면서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살아있는 현감을 위해 생사당을 지을 정도였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의 안성열 관장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던 안의의 후손이라고 한다. 역사는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그 단절을 방지하는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진 역사의 기록이다. 기록된 역사의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어느 지점에 모여 또 다른 역사의 줄기를 만든다.  


조용헌. (2020).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호남의 명촌. 11월 13일.

(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2022). 서원산책. 제6권.

태인 고현동 향약. 태산선비문화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약>.


작가의 이전글 깨진 유리창의 법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