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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pr 11. 2023

평생학습사회의 롤모델, 공자

호학(好學)의 아이콘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 가운데 평생학습사회의 롤모델로 공자를 꼽고 싶다. 공자(BC 551-BC 479)는 일흔셋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단히 배우고 또 배웠다. 논어 공야장편에는 교만을 경계하고 겸양을 강조했던 공자가 자신을 자랑삼아한 말이 있다. “열 집 남짓의 마을이라면 반드시 나만큼 충성과 신의가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저자는 공자의 태산 같이 높고 많은 어록 중에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나라를 위한 충성도 중요하고 사람 간의 관계에서 신의도 필요하지만, 적어도 배움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던 공자야말로 호학(好學)의 대명사로 불린만하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공자는 제일 먼저 책을 읽고 먼저 깨닫는 'first reader'였다.    


또한 공자는 자신이 배우기를 좋아하지만 노력하여 배운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生而知)가 아니라 배워서 아는 학이지(學而知)다. 공자의 공부법은 간단하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배우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다. 호학과 근면이 합쳐지면 큰 학자, 즉 석학(碩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자긍심이 컸고 솔선수범했던 공자가 예(禮)에 대해 묻기 위해 노자(老子)를 찾아 나선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는 공자의 핵심 사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의 대석학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의 도로와 교통 수단을 상상해 보라. 공자는 일행은 원시 수준의 교통을 이용하여 수천수만 리에 이르는 길고 험한 여정을 견뎌내며 노자를 찾아갔다. 호학의 아이콘, 공자의 배움에 대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이 정도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공자는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노자에 대해 깍듯한 예를 갖추는 뜻에서 비둘기 두 마리와 비둘기가 조각된 구장(鳩杖)을 준비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은 70세 이상 되는 공신이나 원로대신에게 구장을 하사했는데 손잡이 꼭대기에 비둘기 모양을 새겼다. 중국 속한서(續漢書)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매년 8월에 나이 80세가 된 백성에게 옥으로 만든 지팡이를 내리는데 끝에 비둘기 모양을 장식했다.' 비둘기는 목이 메지 않는 새라는 점에서 노인의 목이 막히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서양에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동양에서 비둘기는 음식물을 삼키기 어려운 노인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으로 비유된다. 예를 인간 행동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공자는 최선의 예를 갖춰 노자에게 배움을 청한 것이었다.


공자: “선생님, 예에 대해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자: “예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없네.”

공자: “그렇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할 말이 없으시다니요.”

노자: “잠깐만 기다려보게나. 딱 한 가지 해줄 말이 있기는 있네만.” (중략)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공자" "그것이 예입니까?"

노자: "그런 건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자, 이제 그만 가보게나."(최인호, 149-157 재인용).


인류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인 두 사람이 선문답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노자는 자신의 사상을 장사꾼과 군자를 비유로 들어 설명했다.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동양철학의 근원에 무지한 저자는 노자 사상의 근원을 이루는 두 가지는 유약겸하(柔弱謙下)와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이해하고 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함이 오만함을 이긴다"는 유약겸하의 유래는 대강 이렇다. 중국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설원(說苑」 경신(敬愼편에 스승 상용과 제자 노자 간에 오고간 대화가 전해진다.  노자에게는 스승 상용(商容)이 있었다. 상용은 은나라의 신하로 주나라 무왕이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노자는 스승이 병들어 죽게되었을 때 임종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상용: 한참 노자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입을 쫙 벌리더니 "내 혀가 있는가?”

노자: “네, 있습니다.”

상용: “그럼, 내 이는?”

노자: “다 빠지고 없는데요.”

상용: “그렇지, 다 빠지고 없지. 그런데 내가 왜 묻는지 알지?”

노자: “혀와 이를 보고 배우라는 것 아닙니까?”

상용: “뭘?”

노자: “혀가 그대로 있는 건 부드럽기 때문이고, 이빨이 다 빠져 없는 건 강하기 때문이라는 걸 배우라는 말씀 아닌가요?”

상용: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대가 제대로 알고 있느니, 나는 이제 가겠네. 그대에게 천하의 일을 모두 다 일러줬으니,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잘 있게!”(원한식 교수의 블로그에서 재인용).      


노자 사상의 근원을 알게 하는 대화다. '이(齒)'는 사나워서 무엇이든지 깨물고 부수지만 '혀(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나운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것이 오래간다는 가르침이다.  

      

상선약수는 노자의 사상을 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도덕경 8장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물(水)은 만물을 도와 생육시키지만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물은 무언가 한다는 자의식 없이 자연을 돕고 만물을 소생시킨다. 따라서 무엇인가 작위(作爲)하려는 자기욕망을 끊고 물처럼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도(道)다." 인위(人爲)가 없는 무위의 자연을 추구하는 노자에게 예(禮)에 대해 개념을 내리고 규정짓고자 하는 공자의 인위적인 행동(有爲)은 도에 어긋난다고 보이는 것이다. 두 성인 간에 이루어진 무위(無爲) 대 유위(有爲)의 대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공자는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만난 노자에게 제대로 한방 먹은 셈이다. 그때 공자의 예가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지만, 당대 최고 사상가인 노자로부터 받은 비판은 훨씬 충격의 강도가 컸을 것이다. 한편으로 노자가 공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이해가 된다. 형식적, 인위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하는 노자는 세속적인 규범에 따른 교화적,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는 공자와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배움은커녕 비아냥과 수모를 겪었던 공자지만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움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사상과 철학은 더 정교해지고 체계적으로 담금질된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알아주는 주군을 찾아다니면서 이른바 주유천하 13년 만에 고향 노나라로 귀향했다. 천하를 여행하면서 배가 고파 상갓집에서 주린 배를 채우던 때도 많았고, 비전이 없어 보이는 스승 공자를 떠난 제자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은 공자와 일행에게 ‘상갓집의 개’(喪家之狗)라는 욕을 해대며 빈정됐겠는가. 공자는 예순여덟부터 배우고 익혔던 자신의 학문 세계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평생 배우고 익히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던 공자의 놀라운 뒷심이다. 현대인에게는 68세가 사춘기에 해당할 만큼 젊은 연령이겠지만, 기대수명이 40세 정도였던 당시의 연령으로는 많은 나이다. 그는 68세부터 생을 마감하는 73세까지 저술에 몰입하면서 유교의 기본이 되는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의 육경(六經)을 지어 학문으로서 유학을 집대성했다. 대기만성(late bloomer)의 모범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공자와 그 자손들의 무덤은 공림(孔林), 공자를 제사 지내는 사당은 공묘(孔墓), 공자의 직계 자손이 대대로 살아온 생활 주거 공간을 공부(孔府)라고 한다. 공림, 공묘, 공부를 삼공(三孔)으로 부르는데 삼공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인과 후손들의 무덤, 사당, 생활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일 것이다. 그만큼 공자를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흠모한다는 뜻이다. 공림의 현판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적혀있다. 공자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로 청나라 강희제가 쓴 글씨다. "만세토록 모범이 될 위대한 스승"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하늘이 나를 버렸다”라면서 며칠을 통곡했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도 사제의 정을 하늘이 맺어준 관계로 본 영원한 휴머니스트다. 관계는 하늘이 내리고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저자는 평생 배우고 또 익히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고, 말년에 저술을 통해 후세에게 인류의 보편적 사상과 철학을 남긴 공자의 생애를 보면서 진지한 평생학습자의 자세를 되새겨보게 된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겠는가!” 



최인호. (2007). 유림2. 서울: 도서출판 열림원.

최인호. (2012). 소설 공자. 서울: 도서출판 열림원. 

https://blog.naver.com/wonhansik/22267811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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